매거진 나의 여정

어두운 낮

2025. 5. 19.

by 한상훈

악몽을 꾸었다. 그 꿈에서 나는 목사이자 군인이었다. 시간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래된 구막사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목사로 근무하는 것 같았다. 닫을 수 없는 창 너머에는 끔찍한 얼굴의 여자 귀신이 보였다.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꿀 때면 내가 얼마나 뼛속 깊이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는지 생각해보곤 한다. 아무리 공포와 무의식 속 깊은 세계로 내려가도 두려움 속에서 성경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들리곤 한다. 끔찍한 악마들을 마주할 때마다 찬송가가 들리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 한참을 누워있다가 가까운 맥도널드에 가고 싶어졌다. 오래간만에 밤 산책이었다. 밤 산책은 언제나 즐겁다. 요즘 날씨는 선선하고, 밤 10시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남이 아닌 어딘가로 가기 때문에 이 복잡한 강남 한 복판도 한적한 거리가 된다. 강남은 거대한 건축물들이 많긴 하지만 해외를 다니다 보면 딱히 대단하지도 않은 건 사실이다. 서울보다 더 복잡한 홍콩이나 맨해튼이나. 서울도 무척이나 복잡하지만 더 복잡하고 더 엄청난 건물들이 많은 곳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 그런데 바꿔 말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단한 건물들이 모인 곳도 고작 얼마 되지 않은 땅인 홍콩이나 맨해튼 정도의 크기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밤이 되면 거리는 비고, 복잡한 낮에는 보이지 않던 선명한 사실들을 보기 쉬워진다. 얼마나 도로가 넓었는지나 얼마나 큰 소음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사람 없는 텅 빈 밤에는 시끄러운 사람 단 한 명만 있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대의 배기량을 불법으로 개조해 소음 공해를 일으키는 한심한 놈들만 있어도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소음을 경험해야 한다. 대단한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고작 이게 전부인 세상이기도 하다. 고작 이게 전부. 고작.


삶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다는 것은 꽤 독특한 특성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보통 같으면 비판하기 두려운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판도 하고 그들에 대한 화가 무척 나기도 했다. 시원한 밤을 즐기고 집에 오는 길에는 멍청한 대기업 회장들과 무책임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도 고작 한다는 게 내수 시장에서 아득바득 아끼고, 사람들 매수나 해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 스스로 재벌의 위치에 올라가지 못한 재벌가 망나니 자녀들의 공통된 특성인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거나 아니면 리드할 만큼 통찰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이토록 없는 것인가. 애초에 그런 이들이 이 기형적인 대한민국에서는 그 자리까지 못 갔던 것인가.


역사적으로 봐도 시대가 기형적이면 기형적인 인간들이 득세하는 게 맞다. 강력한 왕권과 질서가 있는 국가에서는 문화가 발전하고, 과학자들이 탄생한다. 세종대왕 같은 분이 있었기에 장영실 같은 세기의 인물들도 빛을 본 것이다. 반면 나라가 망국으로 흘렀던 시대를 보면 도적들과 탐관오리가 득세를 하고 곧은길을 가던 이들은 그들의 신념과 충정으로 목숨을 잃었다.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고, 다시 반대로 기우는 것처럼 시대의 추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오고 가는 것만 같다. 선과 악이 아닌 질서와 무질서가 아닐까. 창조와 파괴가 아닐까. 지금의 시대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를 지나서 갈등과 파괴로 향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랬기에 창조로 번영을 이끌었던 이들이 아닌 협잡꾼과 모략가들의 세상이 되어 서로를 기만하고 배신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권세를 얻는 것은 아닐까.




돈이 없던 예술가들이 모이던 곳이 있었다. 서울에도 그런 곳들이 꽤 있었다. 돈이 없는 이들이 모였다는 것은 그곳이 살기엔 부적합한 뭔가가 많았다는 것이었겠지. 그럼에도 예술가들이 한 명 두 명 모여서 자신들의 빛을 발하다 보니 그곳은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예술가들이 만든 거리가 탄생하고, 그 거리를 찾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젊은이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기 시작하고, 상권이 부흥하며 예술가들의 거리는 가난한 자들의 거리에서 연인들과 젊음의 거리로 변모했다.


그러나 돈이 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 탄생하면 당연하게도 돈냄새만 맡아 움직이는 이들이 그 자리를 사기 시작하고, 결국 각각의 색과 향을 발하던 예술가들을 밀어내고 아무런 특색도 없이 껍데기만 있는 장사치들이 자리를 메우게 된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헐값에 집을 내어주던 이들은 값을 올려 받게 되고, 결국 더 이상 낮은 보수로도 자신만의 예술을 하는 이들은 살아남지 못해 거리에서 쫓겨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가 이렇게 또 찢어지게 된다. 다들 상관이나 할까. 어차피 다음 황금 거위를 또 찾으면 되겠지 할 뿐이다.


창조와 파괴가 모든 분야에서 물 흐르듯 일어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멍청한 재벌들이 자신들의 명을 재촉해 망조의 길을 가는 것도 창조와 파괴의 질서를 따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인 것만 같다. 외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할아버지는 맨발로 일해서 부를 쌓았고,

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다니며 부를 쌓았고,

아들은 벤츠를 몰며 부를 즐겼다.


아들이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은 벤츠를 팔고 버스를 타야 했고,

그의 손자는 다시 맨발로 걸어 일터까지 가야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비겁하고, 멍청하고, 상식 밖의 일들을 하는 최고자리에 있는 이들의 미래도 뻔히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영원히 권좌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틀렸다 말해도 고집을 부리며, 약속을 어기고, 신뢰를 저버린 이들. 결과적으로 그들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아주 어두운 낮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밝았던 날들은 이미 모두 끝났고, 특별한 노력 없이도 최고급 음식과 술과 권력을 모두 쥐었던 나날도 모두 끝났고. 모두 자기 몸 부지하기 바빠 조직이 와해되고, 책임을 벗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고. 그렇게 거대했던 기업도, 거대했던 권력도 모두 무너진다. 거목이 자라났던 것도 무너지는 것도 하나의 사이클이겠지. 이것을 부정하고 두려워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그들의 권세에도 끝이 있을 것이다.


Pāpakassa kathaṃkāriṇo,

Madhuvā assa agandhikaṃ;

Yāva pākaṃ na vipaccati,

Yadā ca vipaccati, dukkhaṃ nigacchati.

- Dhammapada 119


악한 일을 행한 자도,

그 과보가 익기 전에는 꿀처럼 달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익을 때,

그는 고통을 받게 된다.

- 법구경 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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