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
미국 드라마는 대부분이 시즌 형태인 것 같다. 그래선지 갈등 하나가 해소되면 뒤이어 새로운 갈등이 나타나고, 이게 반복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스타트업에 몸담은지 4~5년 정도 되면서 이곳이 미드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하게 됐다.
스타트업의 다른 말은 스트레스라 생각한다. 고강도로 열받고, 고강도로 일하고, 고강도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니 스트레스 역시 남다르다. 곶간에서 인심난다고, 곶간이 비어있으니 생긴 인심도 사라지는 법이다. 스타트업은 갈등의 연속이라 하나가 사라지면 새로운 갈등이 생긴다.
내 경우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돈의 문제도 있었지만, 바로 인간관계였다. 보통의 스타트업은 지인을 기반으로 팀을 구성하는데, 지인이다보니 쓴소리를 하다보면 그전의 따뜻했던 관계까지 아작나곤 한다. 일은 시켜야하는데, 남한테 상처는 주면 안되는 상황이 반복되면 내적 갈등이 마일리지처럼 쌓이고, 쌓인 마일리지는 언젠가 쓴 상처로 돌아왔다.
스타트업을 여러번 하면서 위기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부의 위기던 외부의 위기던 모두 살벌했다. 내부의 위기는 핵심 팀원이 나가는 사태다. 인원도 적은 팀에서 한 명이 나가면 분위기는 물론이고, 일처리 속도는 20~50% 지연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초기 창업자들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살벌하게 이를 들어내고 일을 해도 시원찮다보니 적당히 겪어보다 살 길 찾아 나가는 사람이 많다.
외부의 위기도 만만찮다. 투자자가 말을 바꾸는 경우도 있고, 시장이 갑자기 변하는 경우도 있다. 고객들의 요청을 받아 수정한 내용이 도리어 대다수의 고객들을 니즈를 밀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정답이 없다곤 하지만 내부적 외부적 위기를 모두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하는건 불가능하다. 이런면에서 맞으면서 견디는게 중요한건지도 모르겠다.
집나간 팀원이 돌아오거나, 투자가 이뤄지거나, 고객이 팍팍 늘거나 하는 경우 그간의 힘듦은 카타르시스로 바뀌어 더 큰 행복을 준다. 어쩌면 이 해소가 있기에 그동안의 고통을 견디는게 아닐까 싶다. 해소는 다양하게 찾아온다. 내 경우엔 투자 제안이나 스타우트 제안 등이 있었다. 또한 예상치 못한 대단한 분들이 연락을 줘서 네트워킹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엔 투자 유치와 외주, 스카우트 등 좋은 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주변에 치킨집도 없던 평택 촌구석에서 개발하던 시절엔 상상도 못할 일들이다.
마치 미드 시즌이 바뀐 것처럼 해소가 있다면 바로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전국적으로는 코로나가 들어와서 사업에 영향을 주고 있고, 팀 내부적으로도 리빌딩의 시기를 가지면서 크고 작은 갈등들을 겪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돈 줄이 굵어지면 그동안 묶어둔 몫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밖에 없다. 적게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은 큰 것을 요구하고, 많이 받는 사람에 대해선 비난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다.
스타트업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몇몇은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돈과 관련된 문제는 인간관계를 견고하게 하기도 하지만, 쉽게 부수기도 한다. 사업체에 기여한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어갈 수록 자신의 주관이 점점 뚜렷해지기 때문에 강렬하게 주장하게 되고, 강렬하게 방어하게 된다. 스티브잡스가 말한 돌들이 부딫치는 것처럼 일하라는 게 이것이다. 서로 성공을 위해 미친듯이 부딫치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가는게 스타트업이지, 항상 웃고 화기애애하기를 바란다면 다른 분야에서 일해야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척 힘든 길이다. 그리고 무척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밖으로 나오라는 달콤한 유혹이 점점 늘어간다. 그래서 나는 본질을 생각해본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 이 팀과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팀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성공할지 같은 추상적이지만 중요한 질문들을 답하며 성장하는 것 같다. 연마되기 위해선 스트레스가 필요한 것처럼 나는 격렬한 논쟁과 갈등을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타트업에서 스트레스가 없다면 도리어 그게 문제다. 남들보다 2배로 일하고, 박살나고, 남들을 부술 각오로 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와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