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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ose on the Broadway

by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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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en Jacobs-Jenkins의 신작 연극 Purpose를 브로드웨이에서 관람했다. 모든 사람에게 흑인인권운동가 집안으로 존경받는 가족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들어오면서, 그 손님이 만든 균열이 가족 전체를 붕괴시키는 걸 묘사하며 그 속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게 주제의 요지라고 들었다. 그 뒤에 내용은 공개가 잘 안되어있기도 하고 한국에는 아직 소개조차 안 된 따끈따끈한 연극이기에 가족이 다시 연대하는 그런 내용일까 싶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매우 어두운 내용에 놀랐었다. 개인적으로 잘 만든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게, 계속 유머로 주의를 돌리는 전략이 정말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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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미국 앨라배마에 있는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목사의 가족에서 일어난 갈등을 다룬 연극이다. 인물은 크게 아버지(솔로몬, Solomon), 어머니(클라우딘, Claudine), 첫째 아들(주니어, Solomon Japser Jr.), 두 번째 아들(나사렛, Nazareth), 그리고 첫째 아들의 아내(모건, Morgan), 그리고 나사렛의 친구(아지자, Aziza)다.


나사렛이랑 지자가 같이 차를 타고 졸지에 나사렛의 집에 오자마자 나사렛은 엄청난 환영과 함께, 지자는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나사렛이 여자를 집에 데려온 것은 처음이라며, 어머니는 드디어 내 또 다른 며느리를 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한다. 아지자는 알고보니 나사렛이 그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걸 그때 깨닫고, 아지자는 중간에 임신을 암시하는 발언을 나사렛 앞에서 한다.


아지자는 폭풍 때문에 움직이지 못해서, 이 집에서 환대를 받으며 하루를 지내게 되는데, 이때부터 모든 위험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이 극의 화자는 나사렛이며, 나사렛은 제4의 벽을 깨며 청중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묘사하는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아버지, 솔로몬은 은퇴 후 양봉하며 지낸다. 벌이 벌집을 만들며 꿀을 채집하는 과정에 대해 예찬하며, 그걸 통해 신의 섭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나치게 신념이 있는 모습이 나타나며 뭔가 불안한 예감을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족을 억압한 자이며, 어머니는 행복한 가족이라는 모양을 지키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걸 알고 있기에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아지자에게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감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자기가 믿고 싶은 행복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비밀 유지계약서를 쓰도록 종용하며, 부드러운 협박을 한다. 주니어는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정상적인 가족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외부인이었지만 가족이 된 며느리 모건은 이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에 대한 분노를 식탐으로 표현하며 극도로 이 가족에 대한 불편함을 계속 토로한다. 유일하게 나사렛은 이젠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나,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아들에게 여전히 강요하며 끝난다.


이 연극은 한 줄로 요약한다면, "왜 우리는 본질보다 역할에 더 길들며, 자기답지 못하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의 역할이 충실할 뿐, 그 역할에 50년간 충실하여 자기 자신이 사라진 모습이 드러나고, 첫째 아들은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아들로서 열심히 달려왔지만, 인정받지 못하여 붕괴하는 모습이 나오고, 첫째 아들의 아내는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서 아들의 아내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과적으로 붕괴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왜 아지자의 등장이 그 가족에게 위협이 되었을까? 아지자는 자기 결정에 따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명이라는 숭고하지만, 폭력적인 사고관에 살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역할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나타났기에 그 가족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주어진 역할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잠시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정답'처럼 보이는 것들을 따라가고, 그 길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믿으면, 길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자신은 이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행복하다고 믿으면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왜 그 길을 택했는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잊곤 한다. 물론 게임의 규칙에 순종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규칙에 영원히 지배되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잃고, 자기 자신도 잃게 되기 쉬운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 틀에 남을 가두거나, 자신을 가두고 있지 않은지 계속 생각한다.


이런 사람을 찾는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감정보다는 역할에 더 익숙했고, 누구에게는 착한 후배, 누구에게는 착한 가족구성원이 되는 것에 익숙하며, 그리고 그것이 때때로 자신의 삶을 가리고, 갉아먹은 거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우리는, 자신이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역할에 종속되어 그 감정을 외면하는 걸까.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정상 가족에 대한 강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정해진 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곧바로 도태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든다. 성취와 안정이라는 기준이 너무 협소해서, 그것을 벗어난 삶은 곧 실패한 인생처럼 여겨진다. 미국은 조금 다르다. 다양한 가족 형태나 정체성을 존중하려는 문화적 장치는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4인 가족, 싱글 하우스, 안정된 커리어 같은 전통적 성공 모델의 그림자가 있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을 존중하기보다는 개인이 집단의 수단이 되기 너무 쉬운 문화인 것 같다. 특히나 모범적인 가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 산업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미세한 역할 부여와 프로파간다가 존재하는 사회 아닌가? 이걸 깨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되새김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모범적인 가족이라는 상징부터 해체하는 이 연극은, 아마도 한국에서는 이 연극이 상연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