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배우 Robert De Niro는 NYU Tisch에서 졸업 연설을 할 때 '티시 졸업생 여러분, 해내셨군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제 좆됐어요! (Tisch graduates, you made it! and you're fucked!)'라고 말했다. 코미디언 Rosebud Baker는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다음 날 남편이 자신과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운전할 때 일화를 들려주었다. 남편이 "자기야, 나 내 배가 아포요.(Honey, my tummy hurts)"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꾸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배가 아픈지 좆도 신경 안 써. 넌 내 노비야"(I don't give a fuck about your stomach. You're farmhand, now) 모두 영어라서 웃겼던 것 같다. 한국어로 옮기면 적어도 농담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미국에 처음왔을 때,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커피숍에서 'No thank you'라고 말하자 점원은 거진 화를 내면서 응대했다. 한국어로는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거라 공손하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그 표현은 어조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국인 귀에는 쌀쌀하게 들린다.'고 했다. 그 후로는 'I am good, thanks'라고 고쳐 말했다. 그 외에도 'I want to have a coffee'라고 주문하면 예의없는 표현이어서 미국에서는 'Can I have a coffee, please'라고 해야 한다. 영국에는 그 표현도 덜 정중한 표현이라 'May I have a coffee, please'라고 말해야한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너 죽을래'는 친구 사이에서 귀엽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런 표현은 총으로 정말 친구를 죽이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위협적이다. 반대로 영어의 'shut up'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입 닥쳐'다. 그런데, 장난으로 말하는 상황이라면 '헛소리하지 마 ㅋㅋ'이라는 느낌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미쳤다, 대박'이라는 느낌으로도 쓴다. 물론 한국에서도 '아닥' 또는 '닥쳐'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두 말의 어감은 꽤 다르다.
나는 한국어 화자로 생각하고 있을 때는 이가 드러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과거에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수업 시간에 나댄다고 온갖 악플을 받아봤던 기억 때문일까?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정말 듣기 싫다는 피드백을 들어서였을까? 남자는 과묵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가족이랑 같이 여행다녔던 기억은 있지만, 학생으로의 나의 기억은 거의 없는 걸 보면, 무슨 사건이 그때 있었을지도 모른다. 배우는건 좋아했어도, 아마 학교는 나에게 즐거운 공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반면에 영어 화자로 생각하고 말할 때는 자연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Hey how's it going? (잘 지내세요?)"라고 말한다. 몸짓도 영어로 말할 때는 더 커지기도 하고, 표정도 더욱 다채로워진다. '솔직히 네가 뭔 개소리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몸짓 이것도 입술을 쭉 빼면서 흡 하면서 말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요즘엔 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도 미국 사람처럼 영어로 처음에 인사하는 버릇하는 게 왜 생겼을까 했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면 내가 조금 더 친근하고 개방된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마음과 걱정 때문에 말하는 거 같다.
대학에서 한국어로 학부생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다소 진지한 톤으로 강의했었다. 수업을 들으면 깔끔하게 이해가 되고, 논리적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느낌을 전달하는 걸 중요시했던 것 같다. 반면에 미국에서 강의할 때는 톤 자체는 보다 스탠딩 코미디에 가깝게 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f-word는 하지 않는다), 몸동작이 조금 더 커진다. 그리고 보다 가르치는 내용에서 열정을 느끼고 있는 나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얼마나 이 내용을 가르칠 때 열정을 가졌는지를 미국의 학생들이 더 주목하는 것 같고, 그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 같았다.
문득 미국에 한 1년 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빽빽히 차있는 서울 지하철에서 사람들 어깨에 부딪치거나 지나가는 길을 막았을 때, 나도 모르게 반쯤 미소짓고 Sorry라고 말했었던 기억이 난다. 33년을 수도권에서 살았던 내가, 8년간 지하철을 타며 매일 등교를 했던 내가, 그 서울의 어깨빵에도 익숙했던 내가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버스에서 탈 때 내릴때 '안녕하세요' 말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내리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이 왜 그러냐고 했던 기억도 난다. 미국에 살았을때 평소 말 습관을 또 생각해보니, 'I am afraid to say that(이런 말을 해서 유감인데)' 또는 'I am sorry to hear that(이런 소리 들어서 미안해)'과 같은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뱉더라. 한국어로 번역하면 심각한 말이지만, 영어로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어 화자끼리는 친한 사이면 하지 않는 표현들이었던 거 같아서, 처음에는 '네가 왜 sorry 해'라고 받아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국 사람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상적인 말이었고, 그걸 깨달았을 때 꽤 당황스러웠다.
이젠 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건 전혀 어렵지도 않고, 학과 사람들과 대화할 때 농담을 던지는건 전혀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영화, 연극, 뮤지컬에서 자막 없이 그 배우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은 알아차려도 깊은 공감까지 하기에는 막막해진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이해는 할 수 있을 지언정, 나로선 그 말이 전해지는 그 느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그 오펜하이머가 말했던 감정은 느낄지언정, 영어자막이라도 없으면 더 세밀하게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건 나의 복잡한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려면 영어로는 내가 담고 있는 생각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날씨가 참으로 꾸리꾸리하다는 말조차 영어로는 'today is really cloudy(오늘은 날씨가 매우 흐리네!)'라는 사실만 쓸 수 있을 뿐이다. '꾸리꾸리'에 담긴 내 마음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난주 토요일에 맨해튼에서 하데스타운을 관극하고 돌아와 감상문을 일필휘지로 남기고도 입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함을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이 감상문에 담은 나의 세밀한 해석과 감성을 영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가 없다. 원치는 않았던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들었던 문학수업의 영향이었을까?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가르쳤고,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참고할만한 레퍼런스들을 한국어로는 무의식적으로 배웠던거 같다.(+한국어로는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왔는가?)
그러나 미국으로 넘어와서 이제 3년이 넘은 지금, 수학 논문처럼 말하거나 아니면 스탠딩 코미디언처럼 말하거나, 아님 호머심슨처럼 말하고 있는 나만 있다. '불안은 치우는 게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와 내 인생철학을 영어로 진중하고, 깊은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미국에 있으면서 보다 더 나다움을 느끼지만,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한국어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