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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way 뮤지컬 Hadestown 관극

by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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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건, 가나출판사에서 나왔던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에서 봤었다. 그때에는 사랑을 위해 지옥까지 간 오르페우스의 용기와 열정, 그리고 한 순간의 실수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주목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신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단순히 낭만적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랑조차도 인간이 본래 가진 불안 앞에서 쉽게 흔들리고 무너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의지마저 불안에 잠식된다'는 것이 진짜 교훈일 수도 있다.

하데스타운을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았었다. 추천하는 사람들 모두 3-4번이나 봤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궁금했었다. 나는 이 뮤지컬을 볼 때 관전 포인트를 둔 건 두 가지였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의 '진짜 주제'를 어떻게 잘 표현했을까?

인류는 비극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나, 유쾌한 콘텐츠도 많은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뮤지컬에 열광하고 여러 번 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이 비극을 끌리게 만들었을까?

다 보고 나서 내 소감을 말한다면, 이 뮤지컬은 정말 훌륭한 뮤지컬이다. Song through 뮤지컬인걸 깨닫고 못 알아들을 게 걱정되었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무대장치, 캐릭터와 인물의 심리, 주요 넘버와 음악 구조, 그리고 메시지와 교훈, 모든 것이 완벽한 뮤지컬이었다. 추천을 할 만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뮤지컬을 내가 혼자서 다시 볼 것 같진 않고, 내키진 않을 것 같다. 감정의 진폭이 너무 크고 소모적이어서 혼자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변주는 유리디시의 죽음이 원래 신화와는 달리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유리디시는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가난한 인물로 등장한다. 반면에 오르페우스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노래를 쓸 수 있다는 목표를 위해 노래를 쓰고자 했고, 둘은 운명적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유리디시는 처음에 오르페우스의 꿈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오르페우스의 노래로부터 기적이 발생하는 걸 보고, 조금이나마 믿음이 생기게 된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올라와서 잠시 봄이 돌아오나, 봄은 예상보다 빨리 지나가며, 이 뮤지컬에서, 유독 겨울이 길다는 묘사가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암시가 여기서 주어진다. 유리디시는 춥고 배고프기 시작했으나, 오르페우스는 유리디시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작곡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유리디시는 더 이상 가난이란 벽을 이기지 못하고, 하데스타운으로 동전을 내며 지옥으로 가는 기차를 제 발로 들어가는 선택을 한다.


가난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하데스타운에 갔지만, 그곳에서 개인은 없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유리디시는 그 순간부터 후회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자기 자신도 잊기 시작한다. 하데스는 'Why we build the wall'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가난'을 막기 위해 벽을 만들었으며, 자유를 얻기 위해 벽을 만든다고 세뇌를 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정작 하데스타운에서 일하는 존재들은 자유가 없다.


오르페우스는 곡을 마침내 다 썼지만, 곡을 다 쓴 이후에는 이미 유리디시는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였다. 오르페우스는 지하로 가겠다는 결심을 갖고, 기찻길을 따라 지옥으로 걸어간다.


둘은 운명의 재회를 다시 하고, 하데스는 '자기를 감동시켜라'라는 조건을 걸었다. 1막까지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이걸로 무슨 감동을 이끌어낼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2막에서 하데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 노래는 힘을 갖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가 왜 페르세포네를 지상에 못 올라가게 하는지 이해한다며, 상실의 아픔을 이해하며 노래를 부른다. 감화된 하데스는 둘을 지상으로 보내는 대신,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건다.


왜 이렇게 잔혹하냐는 말에, '기회를 준거야'라는 말을 한다. 원전을 찾아보면, 이 부분은 '조건'으로만 제시할 뿐,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데스타운에서는 보다 '기회를 준 것이다'라고 명시를 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의 주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작품이 말하려는 주제가 인간의 불안과 신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키는 파트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Fates는 오르페우스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그 불안을 지우고자 자기가 만들었던 희망의 노래를 계속 불러낸다. 그러나 유리디시가 부른 Wait for me라는 노래를 뒤로하고, 그 불안을 이기지 못해 뒤를 돌아봄에 따라 애틋한 작별을 한다.


마지막에는 헤르메스가 "이건 슬픈 노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불러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극이 끝난다.


이 공연은 내가 알던 신화를 새롭게 비틀었고, 원전이 명시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던 부분을 명시하여 독자들이 그 주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불안에 흔들리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노래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반복을 우리에게 체험하게 한다..

내가 인상 깊게 봤던 파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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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pic I, Epic II, Epic III

오르페우스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음악을 작곡하는데 온 힘을 다한다. Epic I, Epic II까지만 하더라도 이 노래가 왜 힘이 있을지 의문을 가지며 1막을 마무리하나, 유리디시를 잃고 나서는 하데스타운에서 하데스 앞에서 Epic III을 부를 때, 잃었던 사람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과 더불어, 하데스가 왜 그렇게 통제하려고 하는지, 페르세포네를 잠시 떠내 보내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하면서 감동을 울리는 파트. 보다 하데스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파트였다.


2 - Long walk의 원형무대

원형무대는 이 작품에서 제한된 공간을 넓게 만들어주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치였다. 이는 지하로 가는 모습, 권위를 나타내는 모습, 원 위를 걸어가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고, 바깥 원에서 안쪽 원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든 것, 무대팀이 정말 혁신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3 - 페르세포네

원래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봄의 귀환을 상징하는 것 외에는 딱히 묘사가 된 것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뮤지컬에서는 하데스타운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봄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그 과정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춤은 흥겨움보다는 발작에 가까웠고, 술냄새가 진동하며, 모르핀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며, 하데스타운에 있으면서 망가진 모습이 보인다. 극의 끝에 가서는 하데스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갔던 것을 말하며, 다시 사랑을 노래하는 마무리를 가진다. 이 극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파트라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 Flowers

모든 넘버들이 좋지만, 특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작품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넘버를 꼽는다면, Flowers라는 생각이 들었다.


Dreams are sweet, until they're not

Men are kind, until they aren't

Flowers bloom, until they rot, and fall apart


꿈은 달콤하다, 그렇지 않을때까지만.

남자들은 다정하다, 그렇지 않을때까지만.

꽃은 피지만, 썩어가고 떨어지기 까지는 활짝 필 뿐이다. (글쓴이의 번역)


Flowers, I remember fields of flowers

Soft beneath my heels

Walking in the sun, I remember someone

Someone by my side, turned his face to mine

And then I turned away, into the shade


꽃, 나는 꽃밭의 꽃을 기억해.

내 발꿈치 아래에 있던 폭신한 감촉을 기억해.

햇빛 밑에서 걸어가며, 나는 누군가. 내 옆에 있던 누군가를 기억해.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그러나 나는 그를 외면한 채, 나는 그림자속으로 몸을 돌려버렸어 (글쓴이의 번역)


꿈은 영원하지 않고, 달콤함은 언젠가 깨지고. 사람은 언제든 변하고 배신할 수 있고. 자연도 결국 썩어 무너진다.

결국 불안감에 이끌려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문장이 아닐까 싶었다.

소중하던 것들에 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불안에 이끌려, 도망친 자신에 대한 후회를 깊게 드러낸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희망이 있어도 불안을 다룰 힘이 없으면, 사람이 쉽게 무너지고, 후회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오르페우스에 대한 사랑노래라고 하기에는 더 깊은 노래라고 생각한다.


하데스타운을 통해 자본주의의 몰인간성에 대한 독해도 가능하나, 그런 거창한 이름을 두지 않고도, 가난이라는 공포로 생각을 마비시키는 모습은 우리가 현시대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마비된 모습을 깨우는 건 사랑이라는 것을 이 작품에서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과연 희망을 말하는 걸까?


이 작품이 남긴 건 단순한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힘으로 불가능한 것도 극복해 내는 모습을 가진 초인조차 불안을 이길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We raise our cups은 커튼콜 이후에 불러지는 노래다. 커튼콜은 연극이 끝났으며 배우와 관객에게 현실로 돌아오라는 의례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슬픔의 감정은 잠시 씻겨나가고, 다시 이 이야기를 반복할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진다. 만약 이러한 의례가 없었다면, 감정의 진폭이 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절망감만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여러 번 보게 되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 같다. 극은 관객을 짧은 시간 동안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다가, 철저히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동시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씻어내는 과정을 제공한다. 관객은 그 강렬한 고조와 해소의 순환을 다시 체험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래서 하데스타운은 비극임에도 반복 관람을 할 수 있는 작품이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무엇을 얻어가야 할까? 하나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을 갖는 것. 또 하나는 불안을 치워버리려 하지 않고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내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부르며 불안을 치우려고 하지, 불안을 안고 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전승을 통해, 불안을 치우지 않고, 안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지만, 이 작품에서 그 부분이 전달이 안 된 것은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Myra Molloy의 유리디시는 정말 좋았다. 현실에 굴복하고, 그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잘 표현하는 Flowers 넘버와 오르페우스를 따라가며 부르는 Wait For Me는 앞으로도 계속 기억할 장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Myra Molloy의 Flowers 넘버 부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1gLAOIBT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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