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두 번째 글쓰기 가르침
대충 훑어보면 그럴듯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 내용이 없는 보고서가 있다. 이런 보고서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망, -예측, -방향, -전략 같은 제목을 달고 있거나 하나 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겨울에 눈 내리는 이야기네?”, 어느 날 열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받아보고 난 사장의 반응이다. 순간 입 꼬리가 올라갔다. ‘감동을 받았다는 표현인가?’, ‘그동안 욕먹은 보람이 있었나?, 이런 칭찬을 듣다니!’ 환희에 차서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들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옅은 미소를 띠며 사장은 말한다. “눈은 겨울에 내리지 여름에 내리냐? 왜 이렇게 뻔한 이야기만 써왔어?”
사장은 아무 때나 보고하지 않는다. 사장이 직접 보고하는 자리는 특별한 자리다. 사장의 보고서에는 경영 철학과 회사 운영 원칙, 미래 성장 방향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자리에서 뻔한 이야기만 하고 나온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사장은 이를 뻔히 알고 있었다. 상투적이고 일반론만으로 가득 찬 보고서에는 어디에도 사장 목소리가 없었다.
사장이 지적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보고 받는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우리 이야기가 명료하게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 “앞으로 이제 겨울이 오니까요. 눈도 내릴 거고요. 사람들은 옷을 두껍게 입을 거예요.”가 아니다. “앞으로 이제 겨울이 옵니다. 언제 언제 눈이 내릴 예정이기 때문에 사전에 어떤 준비를 해 놓을 것이며, 눈이 예상과 다른 날에 내리면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미리 이것저것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겨울을 끄덕 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를 원했다.
글로벌 성장 전략을 수립할 때다. 글로벌 추진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 회사는 해외 현지에서 사업을 완결하게 추진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여야 하고, 현지 기업들과 협업과 제휴를 강화해야 하며, 경영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고 썼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 어느 회사나 말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사장 말처럼 겨울에 눈 내리는 뻔한 말들만 장황하게 채웠다.
사장 검토를 마친 최종 보고서에서 생태계 구축은 삭제됐다. 현지 기업들과 제휴를 강화하자는 이야기는 기술 보유 기업, 원료 보유 기업, 고객과 조인트 벤처 또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추진하여 사업화 기간을 대폭 단축시켜보겠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협력 대상 후보 기업들과 사업 아이템들도 구체화했다.
경영 인프라를 확충하겠다는 이야기는 주력 제품 판매를 확장하기 위하여 재무, 구매, 인사, IT와 같은 지원 기능을 한 곳에서 운영할 수 있는 ‘통합 매니지먼트 인프라 구축 및 통합’으로 변경되었다. 해당 아이템과 구축 모델도 새롭게 제시하였다. 콘셉트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세부 내용은 오롯이 우리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다음 행동이 뻔히 예상되거나 스토리 자체가 진부하여 관객들이 몰입하지 못하면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나 주인공의 심경변화가 있어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친구나 동료와 대화를 할 때도 뻔한 이야기를 마치 자기만 알고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듣고 있으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사장은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빗대어 보고서 수준을 비판했다. 사장은 보고서를 쓸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조목조목 가르쳤다.
첫째, 깊게 고민하여 얻어진 결과를 적어야 한다. 성장사업을 개발하겠다고 한다면 아이템을 둘러싼 전후좌우 상황은 어떠한지, 개발 성공에 필요한 핵심 요소는 무엇인지,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은 무엇인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들여다봐야 보다 목적에 적합한 구체적인 내용을 쓸 수 있다고 했다.
둘째, 아이템들을 덕지덕지 붙여 모으지 말아야 한다. 보기에 비슷한 유형 같지만 깊게 살펴보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속성을 한 통에 담아 표현하다 보면 실체도 없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어렵다. 의미가 큰 한 두 가지 아이템에 집중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보고서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쓰는 용어를 사용해달라고 주문했다. 신문이나 경영잡지에서 사용하는 멋들어진 표현 말고 우리 회사 상황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쓰라고 했다. 경영 용어도 특정 시점에 따라 유행하는 말이 있다. ‘고객 Pain point’, ‘Demand Capture’, ‘Market Crack’ 같은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다. 이런 용어를 놓고 우리 상황을 끼어 맞추다 보면 엉성한 그림이 그려지기 일쑤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편한 우리 고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장에게 보고하기 앞서 우리는 늘 “겨울에 눈 내리는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보고서는 대체로 미사여구가 많거나 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지루하게 늘어놓는다. 보고서를 읽고 나면 언제나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라는 의문부호가 따라다닌다. 이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보고서를 탈고하기 전에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치열한 토론을 하기도 하고 유의어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 선택을 신경 쓰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사장의 가르침은 길을 잃지 않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