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2019년 밴쿠버에 다녀온 경험을 작성한 글입니다)
아내는 여행을 끔찍이 사랑한다. TV 홈쇼핑에서 현란하게 선전하는 여행상품을 즐겨 볼 정도다. 홈쇼핑에서 나오는 여행지 영상만 봐도 어느 정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따금 멍하니 여행 상품을 쳐다보는 아내를 보고 있자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내와 연애를 할 때다. 봄이 기웃기웃 고개를 들었지만 바깥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어느 한적한 주말 오후 드라이브를 떠났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자고 양수리 두물머리로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내 여행 이야기를 했다. 기억에 남는 장소와 음식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서 여행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넘어갔다. 아내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좋다고 말하며 아무런 계획 없이 갔다가 그대로 3년을 눌러앉은 곳이 밴쿠버라고 했다. 심지어 여행을 못 가는 경우에는 김포공항에라도 간단다. 공항 근처 카페에 앉아 오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며 방긋 웃어 보였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날 보며 미소 짓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적지에 금방 다다랐다. 차를 주차한 뒤 조금 걸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무는 해를 나란히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내는 시선을 돌려 여행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인지를 내게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첫째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 시간이고 둘째는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라고 답했다. 아내는 묘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나에게 공항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공항에 도착하면 행복감이 정점에 이른다. 공항은 일상과 여행을 잇는 매개체다. 인생에서 가장 온전하게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곳이자 떠나는 자의 설렘을 고조시켜주는 마법 같은 곳이다.
그 무렵 나는 연수차 떠났던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머물르는 동안 주말에 시간이 비어 일행 몇 명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는 여느 여행자처럼 가우디 버스투어를 즐겼다.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가우디 건축물을 구경했다. 구엘공원, 카사바트요, 카사밀라를 보고 나서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을 마지막으로 일정은 끝났다.
가이드가 여행을 마치며 우리에게 건넨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수입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매일 설렘 가득한 표정을 한 관광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하루하루가 행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지금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의 웅장함만큼이나 무게가 있는 가르침이었다.
3개월을 기다려 마침내 여행 날이 왔다. 우리 가족은 밴쿠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철도에 올랐다. 네 살 아이와 함께 움직이느라 시간은 조금 지체되었지만 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즐거웠다.
공항 출국장에 빼곡하게 들어선 항공사 광고와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화면이 눈에 들어오자 환호했다. 공항을 찾은 여행객들의 들뜬 북적거림을 보니 나 또한 일상을 탈출하는 여행자임을 실감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던 가이드가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은 내가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다른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문득 그 가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일상이 여행이었다.
여느 때처럼 항공사 창구로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15분 정도 남짓 지나자 창구에 앉아 있던 한 직원이 우리를 향해 손을 든다. 짐가방을 가득 실은 카트를 몰고 천천히 다가가 여권을 건넸다. 모니터를 응시하며 수속을 돕던 직원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묻는다. “혹시 eTA 신청하셨나요?”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공항이 주는 즐거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캐나다에 비행기로 가기 위해서는 미리 전자여행허가(eTA, Electronic Travel Authorization)를 받아야 한다. 7달러만 내면 인터넷으로 손쉽게 발급받을 수 있다. 나와 아이는 따로 신청했고, 아내는 본인 것만 별도로 접수했다. 우리는 문제가 될 일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말투로 보름 전에 이미 승인 통보를 받았다고 항공사 직원에게 말했다.
“저...... 아내분 여권이 승인이 안된 걸로 나오는데, 혹시 받으신 승인 메일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내는 휴대폰을 꺼내 캐나다관광청에서 온 메일을 찾아 직원에게 보여줬다. 직원은 모니터를 잠시 응시하더니 뭔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들며 말한다. “여권 번호 끝자리 하나가 잘못 입력되었어요.”
eTA 승인 없이는 어떤 경우에도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했던 터였다. 어쩌자고 제대로 확인을 안 했을까. 미리 한 번만 살펴봤더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를 응대해 주던 직원보다 조금 더 선임으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불안을 가중시켰다. “지금 빨리 승인을 다시 넣어보시고요. 30분 안에 승인이 안 나면 나머지 분들 먼저 가실지 아닐지 결정하셔서 알려주세요.”
일은 점점 더 커졌다. 부랴부랴 휴대폰으로 eTA를 다시 접수했다. 10분 정도 기다렸는데 승인 메일이 오지 않는다. 아내는 만약 안되면 우리 먼저 출발하라고 한다. 당황스러웠다. 점점 조급해졌다. 이대로 비행기에 오를 수 없는 걸까? 좀처럼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항공사 직원에게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전화를 들어 캐나다 관광청과 통화를 시도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딱딱한 지침과 원칙을 거들먹거리는 담당자를 만나지 않은 건 큰 행운이었다. 직원은 마치 자기 일처럼 대응해줬다. 우리가 이미 승인을 받은 상태였고 여권번호에 오류가 있어 재신청도 한 상황이라고 차분히 말했다. 비행기가 곧 출발해야 되니 지금 바로 확인을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직원은 통화를 마친 뒤 여전히 무표정을 한채 우리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바로 승인했다고 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온몸을 짓누르던 불안이 한순간에 전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우리 모두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직원을 향해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뜻밖의 환대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직원은 마지막까지도 그저 덤덤했다.
재빨리 항공권에 표시된 게이트로 움직였고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른 묵직한 해방감을 느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10분 남짓 지나자 기장은 정상적으로 비행기가 운행 중이라는 안내 방송을 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모니터를 켜니 9,500미터 높이에서 1,000킬로미터 속도로 비행을 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비행기에 탈 수 없을 거란 걱정뿐이었는데 지금은 비행기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거친 호흡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비행기 속도가 빨라질수록 평온해졌다. 태평양 그 어딘가를 가로지르는 걸 실감하자 온 몸에 힘이 쭉 풀렸다.
여행을 떠날 때 이보다 더 번잡스러운 출발을 또 겪게 될까? 다시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때 느낀 불안과 걱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게으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직원의 부지런한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결같이 무뚝뚝했던 그 직원의 표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진다
여행은 미리 품은 기대를 여행지에서 하나씩 확인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기대가 현실에서 부합할 때 성취감을 느끼고 반대의 경우에는 좌절을 맛보거나 평상 안 해도 될 고생을 겪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였을 때 낯선 곳에서 경험한 좌절과 고생은 더욱 선명한 기억을 남긴다. 유명 건물 앞에서 사진 몇 장 찍을 때 기분은 쉬이 잊히기도 하지만 극적인 실수는 평생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그래서 여행 중독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닌지, 밴쿠버로 가는 여덟 시간 동안 항공사 창구에 있었던 일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캐나다에 간다면 eTA는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작성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