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을 첫 책으로 김영민 작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을 선택했다.
새해 첫날부터 무슨 죽음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지난 연말 직장 동료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아서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솔직하게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했었다.
나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나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이 어떨지 헤아리는 것이 전부이다.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다가올 것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죽음은 나와 동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은 언젠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이런 죽음을 ‘언젠가’에서 ‘세 달 후’라고 시점만 바꿔도 많은 것이 바뀐다.
당장에 지금 내 삶에 고뇌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어땠는지 보다는 남은 시간이나 죽은 뒤에 기억될 것들이 중요해진다.
삶의 우선순위가 통째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김영민 작가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의 시점을 바꿈으로써,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할 수 있도록 질문 던지고 있다. 죽음 만을 생각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겠다. 뭘 하든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이 목도에 와있을 때는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세상 큰 문제처럼 느껴지고 그 문제만 없으면 행복 해질 것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서도 그것이 큰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가 사라지면 진짜 행복해지는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면 새로운 문제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모래시계 바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행복에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 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되게 잠시의 쾌감의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십 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23p -
우리도 알고 있다. 눈앞에 닥쳐 있는 문제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 현실적 문제들도 지나칠 수 없기에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가족, 개인 시간, 여행 등)들을 우선순위 아래로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힐 또 다른 문제들을 찾아 인생의 우선순위 맨 위로 올려놓는다.
하지만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당장 한 달 후에 죽는다 가정하면 지금의 눈앞의 문제에서 허우적거리는 행동은 멈추고, 뒤로 미뤄두었던 삶의 중요한 것들을 조금씩 위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
바로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이다. 프랑스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는 불우한 환경에서 극도로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을 하면서 사회의 무관심을 여실히 느끼고, 17살 때는 결핵에 걸리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배웠다.
이방인에서도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책은 뫼르소라는 청년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전혀 슬퍼하지 않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옆집에 사는 레몽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문제에 휘말리면서 살인을 하게 되고 결국 어떤 일에도 무심한 태도에 대해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고립된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면서 뫼르소는 인생의 부조리함 (죽음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끊임없이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깨닫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비로소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과 화해해야만 했다.”
알베르 카뮈 , 이방인 -
인생의 부조리함이던, 사회의 기대와 편견, 그리고 죽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저버리지 못하고 계속 괴로워한다. 누군가의 기대를 , 관심을 바라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에 슬퍼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은 덜 수 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가 중요하냐며 허무주의에 휩싸여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루라도 죽음을 늦추기 위해 수술과 약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거부 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까?
언젠가 죽겠지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죽는 순간까지 현재 주어진 삶을 끝까지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완성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죽어야 미완성 곡도 생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성이기에 나는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한다.
이번 글은
김영민 작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을 페어링 해보았습니다.
다른 두개의 서사가 만나는 지점이 있는 페어링 레서피였습니다.
[관련자료]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8974363
알베르 카뮈, 이방인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19973
[발췌문]
김영민,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죽을 수조차 없다. 이미 죽어 있으므로, 살아가는 일은 죽어가는 일이므로, 그리하여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우리는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불쌍한 영혼들에 불과하다고, 부하가 이만 죽으러 가야겠다고 하자.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 스스로 아직 살아 있다고 여기는구나.” 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프롤로그 , 7 p
살아가다 보면, 자기 안의 관광객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곳, 금각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자기 안의 고지식한 안내자가 천천히 답을 생각하고 길을 가르쳐주려고 하면, 그 관광객은 이미 서둘러 떠나고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대개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교토기행 : 무진기행 풍으로 33p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미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 할 대상 자체가 없다.
- 성장이란 무엇인가, 37p -
사실 인간 자체가 설거지 거리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의 육체는 땀과 침과 피지를 분비하고, 각질과 군살을 만들어 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타성, 나쁜 습관, 부질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면에서 성장과 노화란 곧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거지 없이 깔끔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