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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화 Oct 29. 2024

시절인연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고 헤어질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

"여보세요... 저, 실장님 구하시나요?"

"어... 며칠 전에 구했는데요. 맘카페에 구인광고 내린 지도 꽤 되었는데..."

"아... 아는 언니가 여기 실장님 구한다고 해서 전화해 봤어요. 벌써 구하셨구나. 알겠습니다"

....

"저, 잠깐만요. 혹시 다른 부동산 소장님이 구하시거나 하면 연락드릴게요. 성함 좀 알려주시겠어요?"

평소와 달랐다. 다른 때 같았음 신경 안 쓰고 끊어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 메모를 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수첩에 눈에 잘 띄도록 적어 놓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애 띄지만 예의가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던 것 같다.


부동산을 옮기고 실장님 구인광고를 맘카페에 올렸을 때, 올리자마자 업무가 마비가 될 정도로 전화가 왔다.

요즘 우리 동네에선 실장님을 구하는 부동산도 없는 데다 부동산일에 대한 관심과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 좋은 시간대에 할 수 있는 일이라 동네 엄마들의 문의가 빗발치는 듯했다.

여러 통의 전화를 받고 몇 명을 추려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었다.

꼴랑 동네 쬐끄만 부동산을 운영하면서 실장님 면접을 보겠다는 것이 참 가소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지만 함께 일할 사람이 나와 어느 정도는 세계관이 비슷하거나 색깔이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명 면접을 봐서 고르기로 했다. 그중 독특한 모자, 직접 실로 짠듯한 골무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나타난 J가 마음에 들었다. 눈꼬리가 처져서 선한 인상을 풍기는 J는 목소리도 차분하고 참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내일부터 출근하실 수 있으세요?"

"어... 저기 죄송한데 내일은 가족여행이 잡혀 있어서, 다음 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아, 아니다. 남편에게 물어보고 가족여행을 취소할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어 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음 주부터 하셔도 됩니다. 급하지 않아요. 하!"

그렇게 J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J는 손님에게도 나에게도 항상 살갑고 상냥하게 대했으며, 전화응대도 마치 일을 해봤던 사람처럼 잘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내가 인복이 있다고 하더니 실장님을 잘 뽑은 것 같아'

하지만 J와의 인연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부동산을 개업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났다며 그만두겠다고 한다. 이제 손발 맞춰서 열심히 재미있게 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난감했다.

이렇게 빨리 개업을 할 거면 내 사무실에 왜 취업을 했나 하는 서운함도 생겼다.  그래도 어쩌겠나, 좋은 마음으로 보내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래서 그랬나 보다.

몇 주전 적어두었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났다.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 촉이 발동해서 그 아이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싶었나 보다.

"저, 안녕하세요. 일전에 전화 주셨죠? 실장님 자리 구하신다고... 오늘 잠깐 사무실에 면접 보러 오실래요?"

그렇게 만났다. 지금의 실장님을.


실장님은 나이에 비해 무척 어려 보이는 외모에 곧잘 재미있는 농담도 잘하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서 척척 해내는 것이 고용한 입장에서 조금 미안해질 정도로 열심히였다.

조금 모자란 듯 보이나 똑똑하고 진지한 듯 하지만 심각하지 않고, 내가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잽싸게 MR을 검색해서 틀어주는 신박한 센스를 가진 아이였다.

무엇보다 아무런 계산이나 사심 없이 사람들에게 일단 잘하고 보는 성격이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같이 일하는 동안 나도 해줄 수 있는 건 아낌없이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사무실에 일하러 오기 전에 공황장애랑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거든요. 그런데 사무실에 일하고부터 많이 좋아졌어요. 소장님이 가끔 칭찬하시면 자존감이 뿜뿜 올라서 진짜 내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져서 자신감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하하"

"응? 우울증이었다고? 실장님처럼 밝은 성격이?"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실장님이 아팠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마냥 순수하고 마냥 즐겁게 사는 참 부러운 성격을 가진 아이구나! 했는데 조금 놀라웠다.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에게 생각지도 못한 배신을 당해서 그 충격으로 공황장애가 왔다고 한다.

알 것 같다. 사람 좋아하고 계산 없고 순수한 성격에 그 친구에게 얼마나 잘했을지. 그리고 얼마나 그 친구를 좋아했을지. 그렇게 믿고 좋아하고 의지해서 간이든 쓸개든 친구가 달라하면 다 주려고 했겠지. 

그리고 알다시피 원래 믿었던 사람이 때리는 뒤통수가 제일 아프지.

"힘들었겠다. 나도 그런 친구 있었어. 처음엔 나도 너무 상처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글쎄. 그냥 인연이 다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리고 다시는 엮이지 않겠다는 의지로다 카톡 전화 모두 차단하고 번호를 지운 사람이 한 명 있지. 크크크

알아.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 그리고 너무 좋아해서 물질적인 거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다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그런 친구.

근데 그런 친구와 헤어질 일이 생겼고, 처음엔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하는 괘씸함이나 원망도 있었지만 인연이 다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나도 그 친구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아마 그 친구도 나를 만나는 동안 그랬을 거야. 

인연이 끝났고, 헤어져야 할 사람은 헤어져야 하며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지는 거지.

지금 실장님이랑 내가 만나서 같이 일을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됐어.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남이 끊긴 후에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배운 것 같아.

일단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

내가 그 친구에게 쏟은 정성만큼 반이라도 나 자신에게 해줬는지 물어봐야 했어.

아니더라고. 그동안 내가 나를 너무 업신여긴 거야. 일단 나부터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지.

그리고... 좋은 친구는 말이야. 내가 진짜 마음이 편해지고 내가 정말 단단해졌을 때 그때 보이는 거더라고.

아마 실장님의 옛날 친구는 지금 실장님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게 되거든. 상대방이 베풀었던 호의나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실장님은 좋은 사람이라 앞으로 훨씬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서 살 거야. "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살면서 만나는 많은 인간관계들 속에 지쳐서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게 된 것 같다. 얼마 전 친한 언니네 부부가 큰 아이의 고등학교 동창의 학부모 부부를 만나서 술 한잔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며 집요하게 전화를 했을 때도 온갖 핑계를 대가며 나가지 않았던 것도 아마 사람에 대한 박애주의 정신이 사라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언냐. 내가 부동산 하는 사람인데, 낯을 가린다. 신기하지? 그리고 오늘 저녁은 우리 아파트에 축제가 열린다더라고. 너무 구경 가고 싶어. 그러니까  술자리는 못 가. 미안!" 

예전에는 거절을 못해 끌려가듯 갔을 자리도 이젠 가지 않게 된다. 

받기 싫은 전화 안 받으면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되는 자유와 권리가 내겐 있어!

그리고 법정스님이 그러더라고 인연 함부로 맺지 말라고.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재미없게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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