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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Apr 09. 2021

USS Enterprise(CV-6)

역사에 남은 선박들

"There are no great people in this world, only great challenges which ordinary people rise to meet."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오직 평범한 인물들이 일어나 맞서는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Admiral of the Fleet William Frederick Halsey Jr.)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의 미 태평양함대를 기습 공격한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본 해군항공대의 기습에 일요일 아침을 만끽하고 있던 미국은 그야말로 속절없이 두들겨 맞았고 서전에 함대에서 운용 중이던 8척의 전함이 모조리 전투불능으로 빠지는 참담한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거함 거포 시대에서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 항공모함으로 전쟁의 헤게모니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고 있던 USS Lexington(CV-2), USS Saratoga(CV-3), USS Enterprise(CV-6) 세 척의 항모는 초전의 재앙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특히, 엔터프라이즈는 예정대로라면 진주만에 기항하고 있어야 했지만 귀환하던 중 열대성 폭풍을 만나 입항이 늦어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하루 차이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는데 결과론으로 말하자면 이 하루의 차이가 미국과 일본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결과를 낳았다고도 할 것이다.


미 해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격전에 빠짐없이 참전했으면서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BIG-E, Grey Ghost로 불렸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역사

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USS Langley(CV-1)

1913년 건조되었던 석탄운반선이었던 Jupiter호에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비행갑판을 설치한 USS Langley를 1922년 3월 준공하면서 미 해군은 드디어 항공모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 전투함으로 건조된 것도 아닌 보급함을 급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장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만나게 된다. 비행갑판이 너무 좁아 이착륙이 쉽지 않았다는 것부터 느린 속도로 인해 다른 군함과 함께 기동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산적한 문제들에 봉착하고 만 것.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미해군이 항모 운용술을 터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훗날의 초석이 되는 큰 의미를 가진다. 

USS Saratoga(CV-3)

결국 해군에서는 '제대로 된 항공모함'의 출현을 고대하게 되었고 건조 중이었던 렉싱턴급 고속 전함을 항공모함으로 설계 변경하여 1927년 11월, USS Saratoga(CV-3)를 준공시키게 되었고, 진수는 빨랐지만 개장이 늦어지며 네임쉽이었던 USS Lexington(CV-2)이 한 달 뒤인 12월에 완성, 배치된다. 


애초 전함을 기본으로 개조된 항모들이었기 때문에 선속이나 거주성에서도 먼저 만들어진 USS Langley와 비교될 것들이 아니었고 대양을 무대로 작전을 펼치기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처음부터 항모로 설계된 함정이 아니었던 탓에 탑재 가능한 함재기의 수가 덩치에 비해 적다는 문제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것. 결국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계획되고 설계, 준공이 이루어진 전용 항모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USS Lexington(CV-2)

하지만, 보급함, 전함에서 개조해서 만들어낸 항공모함이 아닌 아예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만들어진 항모의 출현은 193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되는데 USS Ranger(CV-4)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처음 설계 때에 다른 함종이었던 함선을 개조했던 전임자들과 달리 레인저는 렉싱턴급(설계상 37,000톤)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14,810톤)였음에도 20여 대밖에 차이 나지 않는 항공기 탑재능력을 보유하며 개장 항모와의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레인저는 2차대전 내내 대서양에서 활동했으며 사라토가, 엔터프라이즈와 더불어 2차대전 이전에 건조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3척의 항공모함 중 하나가 된다. 

애초 항모로 설계되어 탄생한 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USS Ranger(CV-4)

전용 항모의 효율성을 확인한 해군은 레인저에서 나타난 부족한 부분을 더 보완하여 보다 큰 전용 항모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3척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들로 네임쉽인 USS Yorktown(CV-5)와 USS Enterprise(CV-6)가 1936년 4월 4일, 1936년 10월 3일 이어서 진수되었고, USS Hornet(CV-8)은 한참 뒤인 1940년 12월 14일 진수하게 된다. 

앞선 선배들을 운용하며 드러난 약점들을 보완해서 태어난 이 세 척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이어진 세계대전에서 그 어떤 항공모함들도 세우지 못한 위업을 세우며 활약하게 된다. 

뉴포트에서 건조 중인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이 두 척의 항모가 전쟁의 양상을 뒤바꾸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일본에게 세 번씩이나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와 기어이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첫째, 요크타운의 활약상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고, 막내 호넷은 진주만에서의 참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미국 국민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던 둘리틀 공격대의 동경 공습에서 육군항공대의 B-25 폭격기들을 이륙시켰던 항공모함이었다. 그리고 둘째, 엔터프라이즈는.....


자매들이 올렸던 전과를 모두 합친 만큼의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한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Husband E. Kimmel 제독.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함대사령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후임자인 니미츠에게 지휘권을 넘긴다.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모두 일본의 공습을 피할 수 있었는데 렉싱턴의 경우 미드웨이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항공대와 해병주둔병력에게 항공기와 기부속들을 보급하기 위해 출동 중이었고, 엔터프라이즈도 웨이크 섬에 주둔 중이던 미 해병대 제211해병 공격 비행대대(VMA-211)에게 와일드캣 전투기 12대를 내려주라는 함대사령관 킴멜 제독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상황이었다. 


12월 2일, 웨이크 섬에 비행기를 내려주고 기습 당일이었던 7일, 진주만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열대성 폭풍으로 인해 입항이 늦어지며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 기습 당일, 일본군이 웨이크 섬으로 밀어닥쳤을 때 엔터프라이즈가 내려주었던 와일드캣들이 대활약하며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발생시키게 되었으니 킴멜 제독의 갑작스러웠던 웨이크 섬 지원 계획이 엔터프라이즈를 구하고 전쟁 초반의 일방적인 열세를 타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하지만, 진주만이 뚫린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했고 킴멜 제독은 후임자인 Chester William Nimitz 제독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기게된다.

Chester William Nimitz

진주만 기습 당시 정박 중이던 전함들에게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던 이유로 저유소와 같은 항만 시설은 대부분 무사할 수 있었고 이는 기습 후 입항했던 엔터프라이즈가 재보급을 받고 바로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기습 이튿날인 12월 8일, 진주만에 도착하여 하루 만에 재보급을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9일 진주만을 떠나 바로 작전에 투입되었고 10일, 일본 잠수함 伊-70을 발견, 격침시켰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올린 첫 전과였다. 


전쟁 초반 전반적으로 미국이 일본에게 밀리는 상황에서도 길버트 제도에서, 웨이크 섬에서 차곡차곡 전과를 늘여가던 엔터프라이즈는 동급의 막내인 호넷과 더불어 기상천외한 작전에 동원되는데 이것이 둘리틀 특공대의 동경 폭격 임무였다. 

둘리틀 특공대 1번기의 승무원들.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H.둘리틀 중령, 리처드E.콜 중위. 뒷줄 왼쪽부터 헨리A.포터 중위, 프레드A.브레머 중사, 파울 J. 레오나드 중사

통상, 항공모함의 경우 정규폭격기와 같은 대형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하겠다는 이 야심찬 계획을 위해 호넷은 모든 함상기들을 이동시키고 육군항공대의 중형 폭격기인 B-25만 갑판상에 장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만약에 만나게 될지 모르는 적 항공기의 공격에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부분의 보완을 위해 함상전투기로 가득 채운 엔터프라이즈가 준비된 것. 

1942년 4월 18일 오전, USS Hornet(CV-8)의 갑판을 이륙하는 둘리틀 공격대의 B-25 폭격기

그리하여 1942년 4월 18일, 일본에서 1,200km까지 접근한 호넷의 함상에서 미 육군항공대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16대의 B-25가 이륙했고 동경을 폭격하는 데 성공했다. 16대의 폭격기로는 물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은 어려웠지만 당시까지 본토는 전쟁과는 무관한 듯 지내고 있던 상황에서 수도의 하늘이 뚫렸다는 것 자체로 일본 군부는 경악했으며 당시까지 수세로 몰려있던 미국에게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준 작전이었다. 결국 이전 야마모토가 입안했으나 대본영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미드웨이 공격이 이 작전으로 인해 조급하게 추진되는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4일~ 6월 7일)

엔터프라이즈 함상의 TBD Devastator 뇌격기.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전멸했지만....

엔터프라이즈는 미군이 일본과 건곤일척을 겨뤘던 미드웨이 해전에 Task Force 16의 일원으로 호넷과 함께 참가하게 된다. Task Force 17로 참전한 요크타운까지 동급의 항모들이 모두 참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해전이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MIDWAY에서도 등장했지만 당시 일본 함대를 종횡무진 쓸어버렸던 항공기 대부분이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소속의 함상 폭격기였던 SBD Dauntless였다. 물론 적 항모 공격의 한 축으로 어뢰 공격을 담당했던 뇌격기 TBD Devastator도 있었지만 이미 개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느린 속도와 신뢰성이 바닥이었던 어뢰의 성능으로 인해 공격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다. 호넷에서 발진했던 뇌격기들과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 소속의 뇌격기들이 속속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했으나 차례차례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 채 전멸당하고 만 것. 

엔터프라이즈 상공을 비행 중인 SBD Dauntless 급강하 폭격기

하지만, 이들의 이어진 공격으로 인해 일본 함대는 이후 이어진 공격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어뢰를 장비한 뇌격기들의 저공으로 침투하여 어뢰를 발사하는 전술로 인해 함대를 적 항공기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던 일본 함상전투기들이 모조리 저공으로 내려와 뇌격기 사냥에 몰두하게 되면서 이후 고공으로 침투한 급강하 폭격기들이 어떤 저항도 받지 않게 되었던 것. 느리고 먹음직스러웠던 손쉬운 목표들에 욕심을 냈던 대가는 결국 고공에서 쏟아져내린 급강하 폭격기들로 인해 비싸게 치르게 된다. 


순식간에 미드웨이 공격에 동원되었던 정규 항모 4척 중 카가(加賀), 아까기(赤城), 소류(蒼龍)를 상실하고 만 것. 마지막으로 남았던 항모 히류(飛龍)도 요크타운을 항행 불능 상태로 빠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에서 몰려든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일본은 동원되었던 모든 항모를 잃고 퇴각하게 된다. 

맏언니의 최후. 미드웨이 해전 내내 불굴의 투지를 보이며 분전했지만 결국 침몰한 USS Yorktown(CV-5)

미 해군도 대승에 가려져 있었지만 항모 3척의 뇌격기 편대들이 모조리 전멸하고 항모 요크타운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본이 입은 치명상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항공기 외에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았던 엔터프라이즈는 이때부터 행운이 따르는 배로 그 명성이 높아지게 된다. 


두 달 뒤, 과달카날 근해에서 벌어진 사보 섬 해전에서 호주를 향하는 교두보로 일본이 점령했던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미 해군과 호주 해군의 연합함대가 출동했을 때, 해전 이전에 두 척의 항공모함을 상실한(렉싱턴, 요크타운) 플레쳐 제독은 불의의 공격으로 인해 항모가 손실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리며 해전 직전에 엔터프라이즈를 후퇴시켰고 이로 인해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터너 제독과 호주의 연합함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된다. 


또한, 항모의 상실은 막았지만 이로 인해 과달카날의 해병 1사단은 고립무원 상황에 빠지게 된 것.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공세로 전환한 해병들의 영웅적인 감투정신으로 인해 과달카날의 일본군 비행장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핸더슨 비행장으로 명명된 이 비행장을 이후, 계속 지켜내며 바다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상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1942년 8월 24일,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공격받고 있는 USS 엔터프라이즈

해병을 지원해야 할 해군이 일찌감치 괴멸되면서 해병만이 보급이 모조리 끊어진 상태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 이어지며 사보 섬 해전에서 온전히 보전된 항모 전력들도 뒤늦은 지원에 나서게 되었고 미 해군 전력은 일소했으나 과달카날의 비행장을 빼앗기며 교두보를 상실한 일본 역시 다시 전력을 끌어모아 공격에 나서면서 1942년 8월 24일의 동부 솔로몬 해역에서 또다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이 맞붙게 된다. 행운함으로 불렸던 엔터프라이즈였지만 이 해전에서는 그야말로 지옥 문고리를 잡았다 놓는 악몽과 만난다. 


미 함대가 일본이 항공모함 류조(龍驤)를 미끼로 던져놓았던 덫에 걸려들고 말았고 엔터프라이즈는 류조를 향해 대부분의 항공기를 띄워 보낸 무방비상태에서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스무 발 이상의 폭탄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내리는 가운데에서 필사적으로 대공포화로 대응하고 회피기동을 펼쳤지만 불발탄 1발이 포함된 3발의 명중탄을 두들겨 맞았고 74병의 승조원이 전사하고 95명이 중경상을 입는 피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명중탄으로 인해 조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적의 2차 공격이 임박한 절체절명의 상황, 엔터프라이즈의 행운은 또다시 찾아왔는데 갑작스러운 열대성 소나기(스콜) 구름에 항모가 가려지면서 적들이 항모를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간 것. 

폭탄에 직격 된 엔터프라이즈의 우현 대공포좌

하지만, 엔터프라이즈도 승조원의 힘만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결국 전선에서 벗어나 수리를 위해 진주만으로 향해야 했다. 수리를 마치고 두 달 뒤인 10월 말이 되어서야 다시 전선에 복귀하게 되는데 여기서 동부 솔로몬에서의 악몽과 맞먹는 큰 위기를 만나게 된다.


산타크루즈 해전(1942.10.25~10.27)

과달카날을 사이에 두고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이 크고 작은 접전을 벌이고 있던 중 발생했던 또 다른 큰 싸움이었던 산타크루즈 해전, 일본은 가용할 수 있는 네 척의 항모와 함대를 긁어모았고 미 해군 역시 단 세 대 남은 항공모함 중 대서양에서 독일과 맞서고 있던 레인저를 제외한 호넷과 엔터프라이즈 자매를 투입하여 맞불을 놓았다. 항모의 수에서 미국이 열세에 있었으나 양진영 모두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즉시 항공대를 내보내서 자웅을 겨룰 준비태세 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미군의 경우 솔로몬 제도 인근에서는 핸더슨 비행장에 주기된 항공전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산타크루즈 해역에서는 거리 때문에 그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모든 전투역량은 완전히 두 척의 항공모함에게 걸려있었다.

일본의 집중된 공격에 불길이 치솟으며 기울기 시작한 USS Hornet(CV-8). 결국 호넷은 이 해전에서 최후를 맞는다. 

함대함 전투 이전에 서로 내보냈던 항공기들의 교전이 먼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일본의 경 항공모함 즈이호(瑞鳳)가 엔터프라이즈에서 이함했던 함재기들의 공격을 받고 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서전에서 먼저 미국이 우위를 점한 것으로 여겨졌던 순간, 일본의 함재기들에게 호넷의 위치가 발각되었고 곧 치열한 전투에 들어가게 된다. 또다시 열대성 소나기구름에 뒤덮인 엔터프라이즈가 적의 시야에서 벗어난 상황이라 모든 공격은 호넷에게 집중되었고 폭탄 4발에 어뢰 두 발, 대공포에 피격된 항공기의 자살공격까지 얻어맞은 호넷은 순식간에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고 스스로 항해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일본 함상기들의 공격을 받는 USS 엔터프라이즈. 무수한 대공포연이 급박한 상황을 말해준다.

호넷에 이어 엔터프라이즈 역시 비구름이 지난 후, 밀어닥친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았고 두 발의 명중탄에 맞아 선내에 격납된 항공기들을 갑판으로 올리고 내리는 역할을 하던 엘리베이터가 망가지고 사망 44명, 부상 75명을 입는 대피해가 발생했지만 필사적인 회피기동과 호위함대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귀환에 대부분 실패했던 일본 항공기들과 달리 엔터프라이즈는 피격을 당해 만만치않은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도 탑재 가능 한도를 넘겨가며 호넷에 소속되어 있던 항공기들을 착함시켰고 무사히 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지근탄을 간신히 피해낸 엔터프라이즈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 해군은 두 척 남아있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중 호넷을 상실했고 엔터프라이즈도 장기간 수리를 요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두 척의 항공모함에 있던 항공전력은 비교적 큰 피해 없이 간수할 수 있었다. 일본은 단 한 척의 항모도 잃지 않았지만 진주만 기습 때부터 전쟁을 이끌어왔던 베테랑 조종사들을 대부분 상실하며 이후 전투에서는 그간의 대등한 모습에서 한참 떨어진 전력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하지만, 미 해군 역시 당장 건조 중이던 신형 항공모함인 ESSEX급 항공모함이 투입되기 전까지 일본 함대에 맞설 수 있는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 하나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 해전에서 입은 피해를 수리하기 위해 전열을 이탈해야만 할 암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함대 사령관이었던 홀시 제독의 명령에 따라 진주만이나 본토로 귀환하지 않고 3일을 달려 프랑스령 누벨 칼레도니(뉴칼레도니아)에 도착, 승조원들과 해군 수리 병력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수리에 나서게된다. 

수리를 위해 뉴 칼레도니아 주도 누메아 인근 해상에 도착한 엔터프라이즈

산타크루즈 해역에서 미국은 두 척의 항공모함 중 호넷을 잃었고 엔터프라이즈 단 한 척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일본 수뇌부는 두 척 모두를 전력외로 판단하는 실수를 미드웨이에 이어 또다시 되풀이한다. 한 달 후, 남태평양 인근에 유일한 항공모함으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리 병력들이 승선, 여기저기 고치면서 다시 전선으로 향한 엔터프라이즈의 출현은 미드웨이에서 맏언니 요크타운이 보여줬던 충격과 공포를 똑같이 일본에게 안기게 된다.

일본군 중순양함 기누가사(衣笠). 돌아온 엔터프라이즈의 첫 번째 제물이었다

1942년 11월 13일, 과달카날 인근에서 벌어진 마지막 접전이었던 과달카날 해전에 뒤늦게 도착한 엔터프라이즈는 역시 서전에 항모 없이 전함만으로 버티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던 미 해군의 수호천사로 복귀한다. 핸더슨 비행장 외엔 항공전력이 없을 거라 자신하며 화력을 비행장으로 집중시킨 상황에서 득달같이 날아온 엔터프라이즈의 항공기들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몰고왔고 포격에 집중하고 있던 아오바 급 중순양함 기누가사는 난데없는 항공기의 공격에 속절없이 침몰당하고 만다. 


과달카날을 함락시키기 위해 상륙병력과 보급물자를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엔터프라이즈의 출현으로 귀중한 수송선들도 모조리 잃고 말았고 결국 과달카날에서 아예 손을 떼게 된다. 아무런 보급을 받지 못한 채 과달카날에 방치된 육상전력의 괴멸도 덤. 이전에 당했던 피해를 배로 되갚아 준 엔터프라이즈의 통쾌한 복수였던 것. 일본은 미드웨이에 이어  없는 전력으로 배제시킨 항공모함이 나타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뼈아픈 교훈만 되새기게 된 셈이었다.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이함준비중인 SB2C-3 Helldiver 급강하 폭격기

이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쌓여가는 전공만큼 큰 희생도 치렀지만 엔터프라이즈는 그 자체가 거대한 역전의 용사로 만들어져가고 있었고 승조원들 역시 그 어느 함정보다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병력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과달카날 해전이 끝나고 1944년까지 2년 동안 17차례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전했고 그 사이 항공모함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했다. 배 자체에 대한 수리와 개량도 이어졌는데 1943년 7월, 워싱턴주 해군공창에서 3개월에 걸쳐 대공화기들과 엘리베이터, 갑판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개량이 이루어졌고 이후 탑재 항공기들도 함상전투기는 구식화 되던 F4F Wildcat을 F6F Hellcat으로, 급강하 폭격기는 SBD Dauntless에서 SB2C-3 Helldiver로 교체하게 된다.

Essex Class의 네임쉽인 USS Essex(CV-9). 전쟁 후 월남전까지 활약했던 미 해군의 주축이었다

엔터프라이즈가 혼자 1942년 말미까지 버티는 동안, 무섭게 돌아가기 시작한 미국의 전시경제능력은 최신형 항공모함이었던 Essex Class를 그야말로 찍어내기 시작했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무려 24척의 대형 항공모함이 찍혀 나오게 된다. 최신형 항모에 비해 구식화 되었지만 여전히 전력의 핵심으로 남아있던 엔터프라이즈는 진보된 장비와 무장의 후배들을 이끌고 이후,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만 해전 등 굵직한 해전에서 활약하며 전공을 쌓아 올리게 된다. 


마지막 임무 - 1945. 5.14 오키나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그동안 일본이 점령했던 점령지들을 미군이 탈환하던 상황에서 일본의 영토로 미 지상군들의 상륙이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 최초의 일본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이었던 이오지마(硫黄島) 전투에서 상륙하는 해병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엔터프라이즈는 마지막 임무를 시작하게 된다. 이오지마를 거쳐 4월, 오키나와 상륙을 지원을 위해 무대를 옮기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본 해군의 광기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살공격대 가미카제(神風)의 공격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 물론 4월, 일본은 전함 야마토(大和)를 편도 연료만 채워서 오키나와로 보내는 무의미한 자살 임무에 투입시켰고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여러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의 손에 개죽음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최후를 맞도록 방치하는 일도 있었다.  


조종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잠수함을 띄우고 비행정을 띄우던 미군의 입장에서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패전의 위기에 몰린 일본의 모습이 그만큼 발악에 이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개량에 따라 대공능력이 대폭 향상되었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모두 겪은 노련한 승조원들의 능력으로 경미한 피해로 공격을 막아내던 엔터프라이즈도 결국 5월 14일,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총 26대의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받으며 25대를 대공포와 항모를 엄호하던 호위 전투기들로 막아냈지만 단 한 대의 자살공격을 막지 못하고 만 것. 선체 앞쪽의 항공기 운송용 엘리베이터로 직격해 들어온 자살공격으로 인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엘리베이터 아래쪽 항공기 격납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고 격벽의 손상으로 함내로 해수가 밀려들어오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45년 5월 14일, 자살공격으로 인해 큰 폭발이 일어난 엔터프라이즈의 모습

이 공격으로 인해 한 번에 사망 13명, 부상 68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했지만 불과 30분 만에 화재를 완전히 진압하고 침수를 막아낼 정도의 엄청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바로 임무에 복귀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그만큼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승조원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이 불가능해진 엘리베이터와 선체 외판의 파공 등은 또다시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한 문제였다. 결국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수리를 위해 임무에서 빠지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종전을 맞으며 공식적으로 모든 전투임무를 마무리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엔터프라이즈는 해외에 파병되어 있던 병력들을 다시 미본토로 데려오는 역할에 나서게 된다. 함재기들을 모두 내리고 항공기 격납고를 승선 병력들의 거주공간으로 개조한 항공모함은 상당한 숫자의 병력들을 나를 수 있는 대형 수송선의 역할에 안성맞춤이었던 것. 


하지만, 만약의 전쟁에 대비한 상비 물자로써의 가치는 보다 신형의 수많은 후배 항공모함에 밀리고 있었고 결국 행운함 엔터프라이즈도 그 최후가 다가오게 된다. 1947년 2월, 엔터프라이즈는 미 해군에서 퇴역하며 전함으로써의 공식적인 생애를 마치게 되는데 워낙 쌓아 올린 엄청난 전과와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희망으로 만들었던 행운함의 이미지로 많은 이들이 보존하여 남겨두길 원했지만 예산상의 문제에 봉착하며 결국 1958년 7월 고철로 팔리며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

1958년 8월 21일, 폐선을 위하여 마지막 항해의 종착역인 브루클린에 입항 중인 엔터프라이즈

전쟁 기간 내내 활약하며 스무 개의 종군 훈장 외에도 대통령 부대표창 등 수많은 전공을 이뤄냈던 역전의 용사 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하지만, 제트기 시대와 냉전기로 접어든 상황에서 더 이상 존재 의의가 없었던 구식 전함의 종착지는 박물관이나 폐선장이었고 박물관으로 남는 것을 오히려 박제화되는 치욕으로 비유하며 전함다운 최후를 원했던 퇴역 승조원들도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쇠로 만들어진 피조물의 마땅한 최후였다고 할 수도 있을 듯. 

뉴저지 리버 베일의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보존 중인 엔터프라이즈의 선미 명판

하지만 엔터프라이즈의 위명은 이후에도 남아 1962년 취역하여 슈퍼캐리어 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 USS Enterprise(CVN-65)로 이어졌고, 2025년 배치예정인 제럴드 R, 포드급 3번째 항공모함으로도 이미 그 이름이 붙어 등장할 예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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