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47

역사에 남은 선박들

by 전재성

"Battleship are the ships of yesterday, aircraft carriers are the ships of today, but submarines are going to be the ships of tomorrow." (Chester William Nimitz)

"어제는 전함이 주력이었고, 오늘은 항공모함이 주인공이지만, 내일은 잠수함의 세상이 될 것이다."

(체스터 니미츠)


우리나라에 병인양요가 있었던 1866년을 무대로 그려졌던 쥘 베른의 SF 소설 '해저 2만 리'의 서막에 미해군의 순양함 링컨호와 미지의 바다괴물과의 추격전이 그려진다. 계속된 바다괴물의 공격에 여러 배들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서 당시 기술력의 정점에 있던 링컨호를 동원하여 괴물을 처치하려 했던 것. 하지만, 오히려 괴물의 습격에 링컨호는 난파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고 링컨호에 탑승 중이었던 세 사람이 바다로 추락했다가 바다괴물에게 구조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바다괴물로 알았던 것이 실은 첨단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노틸러스라는 이름의 잠수함이었고 그 잠수함에 본의 아니게 승선하여 수수께끼의 인물 캔틴 네모와 함께 모험이 시작된다.

Turtle (1).jpg David Bushnell이 만들었던 잠수정 Turtle의 복원품

Robert Fulton이 1800년, 나폴레옹의 의뢰에 따라 만들었던 잠수함의 이름에서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호의 이름을 따왔지만 실제 물밑에서 활동하는 잠수함정에 대한 개념은 그보다 25년 전인 1775년, David Bushnell이 만들었던 잠수정 Turtle에서 비롯되었다. 1인승으로 손으로 스크류를 돌려 운항하는 방식의 Turtle은 원시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설계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제 실전에도 사용되었으며 이후 탄생하는 '잠수함'이라는 무기의 원조로 남아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의 양상을 바꿀만한 Game Changer로써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설프고 조잡한 형태였지만 한 세기가 지난 후 잠수함은 유럽의 바다에서 그야말로 공포의 무기로 등장하게 된다.

U-Boote_Kiel_1914-BG-768x513.jpg 1914년, 독일의 Kiel군항에 집결한 U-boat들

1914년 7월 28일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칭다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극동함대는 유럽으로 귀환하전 중, 12월 8일 남미 동해안 인근에서 벌어진 영국함대와의 포클랜드 해전에서 5척의 전함 중 4척이 격침당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가뜩이나 해군력에 있어서 영국과의 격차가 큰 상황에서 정예로 꼽히던 극동함대가 전멸하면서 영국과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함 대 전함으로 맞서는 고전적인 해전방식을 고집하기에는 전력도 기량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독일로 향하는 바다를 완전히 봉쇄하는 데 성공한 영국에 맞서기 위해서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독일의 방법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었다. 당시 개발에 성공하여 실전에 배치 중이던 잠수함 U-Boot(유보트)를 이용하여 영국함대와 연합국으로 향하는 상선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것.


1915년 2월부터 시작된 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연합국 측에는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하는데 이로 인해 보급의 100%를 바다로 밖에 받을 수 없던 섬나라 영국이 받은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닥치는 대로 보이는 상선들을 모조리 공격하는 방식은 결국 필연적인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15년 5월 7일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격침이었다.

optimize.jpeg 침몰하는 루시타니아호 - 출처: Norman Wilkinson, 삽화(1915)

1,957명의 승조원과 여객 중 1,198명이 사망하는 이 참사의 희생자 중 128명의 미국인 희생자였고 당시까지 전쟁에 발을 담그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을 결국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무리수가 되고 만 것.


미국의 참전은 안 그래도 전황에서 밀리기 시작했던 독일과 추축동맹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고 미국이 참전하고 2년도 채 견디지 못하고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승전국 측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해군에 대해 '해군 병력은 1만 5천, 군함은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노후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전함 6척으로 제한하며 일체의 잠수함 보유를 금지한다.'라고 명시한 것은 그만큼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서 받은 피해가 엄청난 것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잠수함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그만큼 두려웠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용 외에도 승전국 입장에서 패전국을 야만적으로 짓밟는 내용으로 대부분을 할애한 베르사유 조약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까지 이어지며 패전국 독일이 다른 방법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소수당이었던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가 정권을 잡으며 다시 한번 전 세계를 전화 속에 밀어 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바다를 향한 패전국 독일의 유일한 돌파구 U-Boat

다시 불붙은 두 번째 세계대전에서 여전히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맞서게 된 독일의 돌파구는 1차 대전에 이어 U-Boat였다. 물론, 티르피츠, 비스마르크와 같은 거대전함도 장비하게 되었지만 영국함대와의 비교는 일단 수적으로 큰 열세를 보이고 있었고 수적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 세계 어느 나라들보다도 앞선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전대를 통해 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시작한 직후인 1939년 12월, 독일 해군을 상징하던 전함 그라프쉬페를 잃었고, 1942년 말의 바렌츠 해 해전에서 영국의 수송선단을 공격하던 구축함대가 영국해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하며 해군사령관 에리히 레더(Erich Johann Albert Raeder)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잠수함전대 사령관이었던 칼 되니츠(Karl Dönitz) 제독을 임명하게 되는데 번번이 영국에게 밀리던 수상함들과 달리 바다 밑을 누비던 U-Boat들이 얻어내고 있던 전과가 엄청났던 것을 반증하기도 했던 일대사건으로 이후 해전의 양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이른 최후로 인해 자신들의 사령관이 해군의 수장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U-Boat의 높아진 위상에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잠수함이 바로 U-4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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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47

U-47

1937년 진수하여, 이듬해 1938년 12월 실전에 배치되었고 1941년 3월 7일 실종된 U-47은 3년에 미치지 않는 짧은 생애동안 8척의 선박에 침몰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고 31척의 선박을 격침시켰던 에이스 잠수함으로 31척 대부분이 영국을 향하던 수송선들이었지만 영국의 군항 스카파 플로우까지 진입하여 만재 배수량 33,500톤의 대형전함 HMS Royal Oak를 격침시키는 대담한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여전히 거함 거포주의가 그 세를 잃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견고한 군항(軍港)에 정박 중이던 대형전함을 잠수함 한 척이 격침시킨 이 작전은 물론 U-47 함장 이하 승조원들의 대담함과 노련함이 낳은 결과였지만 중장갑과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전함이 잠수함 한 척에 의해 수장될 수 있다는 것에서 전 세계 해군의 거함 거포주의에 종언을 고하는 사건으로 기록될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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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oyal Oak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함정으로 1914년 진수되어 1916년에 취역했다. 취역 당시 기준으로 강력한 15인치(381mm) 함포 8문을 탑재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 1차 대전 후 몇 차례의 개, 보수를 거쳤고 방어력은 여전히 뛰어났지만,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이미 최고속도가 20~21노트 정도에 머물 정도로 노후화된 상태였다.


그래도 뛰어난 방어력과 강력한 화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에 최전선에서 적함과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닌 선단 호위나 지역의 대공 방어 임무에 주로 투입되고 있었고 비교적 적함의 내습이 어려운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의 안전한 정박지인 스카파 플로우에 머물며 수상 요새와 같은 대공포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중 불의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운명의 날 1939년 10월 14일 새벽, 귄터 프린이 지휘하는 U-47이 스카파 플로우에 침투했을 때 로열 오크는 승조원들이 잠든 평화로운 상태였지만 오전 1시 4분, U-47이 발사한 첫 번째 어뢰가 로열 오크의 함수를 강타했다. 하지만, 폭발음이 작았고 함에 큰 피해가 없어 적의 내습이 아닌 함 내에 비치된 페인트통이나 이산화탄소 용기의 파손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보고 넘긴 것이 이어진 재앙을 낳게 된다.


12분 뒤, 재장전을 마친 U-47이 발사한 어뢰 3발이 로열 오크의 선체 중앙부를 강타했고 - 움직이고 있던 상황도 아닌 항내에 정박 중인 상태는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목표 그 자체였고 연습하듯 쏘아댄 어뢰는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고 명중하게 된다 - 그중 두 발이 선내 화약고를 유폭 시키며 거대한 폭발과 함께 배는 순식간에 우현 쪽으로 기울며 전복되고 만다. 피격 후 불과 13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고 모두가 잠든 시간, 불의에 당한 기습으로 함장과 제2전함전대 사령관 블래그로브 소장을 비롯한 총 승조원 1,234명 중 833명이 전사했다.


"절대 뚫리지 않는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스카파 플로우에서 전함의 침몰과 더불어 1천 명 가까운 인명피해를 냈다는 사실은 처칠을 비롯한 영국 지도부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반대로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독일은 그야말로 환호하게 된다.

Marine-im-Zweiten-Weltkrieg-Guenther-Prien.jpg U-47 함장 Günther Prien 소령

1908년 1월 16일, 독일 오스터펠트에서 태어난 귄터 프린은 상선학교에 입학하며 바다에서의 삶을 꿈꾸었지만 1차 대전 패전에 세계적인 대공황 시기가 겹치며 교육을 마치고 상선경험을 쌓았음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락까지 떨어진 경제상황에 권력을 움켜쥐게 된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당)에 경도된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열광했고 1932년, 입당하고 재군비선언과 더불어 재건되기 시작한 독일해군에 1933년,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얼마 후, U-boat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 되니츠의 눈에 들어 잠수함 전대에 배치되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독일군의 일원으로 U-26에 승선,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1938년 말, 대위로 진급한 귄터 프린은 자신과 함께 전설을 쓰게 되는 U-47의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전설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10월, 스카파 플로우 기습으로 전함 로열 오크를 침몰시키며 일약 독일 국민과 나치당의 총아로 떠오른 그와 U-47은 이후로도 대서양을 종횡무진 누비며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는데 총 10회 출전에 30척의 적함을 격침(총 162,769톤)시키며 전쟁 초, 최고의 전과를 올린 잠수함전대의 에이스로써 각광받게 된다.


하지만, 1941년 3월 7일, 귄터 프린을 비롯한 45명의 승조원과 함께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U-47은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서로 독일의 에이스를 침몰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인 영국해군의 목소리와 달리 아직도 그들의 실종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구축함의 폭뢰에 의한 격침설이나 연합군의 잠수함에 의해 요격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대부분 그 진위를 의심받았고 잠항 중에 설치된 기뢰에 접촉해서 파괴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설로 떠올랐고 여전히 기뢰 접촉이 U-47의 최후를 가져왔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로 남아있다.


독소전쟁을 불과 3개월 앞둔 상태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귄터 프린과 U-47의 최후는 독일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을 우려한 나치의 보도제한으로 독소전쟁 이후에 발표되는데 공교롭게도 U-47의 최후와 더불어 전성기에 올랐던 유보트의 신화도 그 시기에 꺾이게 된다.


당시 3대 유보트 에이스들이었던 오토 크레치머의 U-99가 나포되고, 귄터 프린의 U-47, 요하힘 셰프케의 U-100이 모두 1941년 3월, 실종되고 격침당한 것. 여전히 연합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해상 전력으로 전쟁 말까지 꼽혔지만 이후, 유보트는 탐지되지 않고 아군을 도륙 내는 무적의 존재에서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한 적으로 꼽히게 된 것이다. 이후, 단독으로 작전하던 유보트들을 팀으로 묶어 전투에 참여시키는 울프팩 전술이 보편화되나 1943년, 레이더와 전파추적 등을 활용한 연합군의 대 잠수함 전술로 큰 피해를 입었고 1944년, U-505가 나포되며 실려있던 암호체계인 이니그마가 연합군 손에 들어가며 이후 잠수함대의 전문을 해독한 연합군에게 독일의 유보트 전대는 위협적인 사냥꾼에서 속절없이 사냥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About_Carousel_04_14daf8296d.jpg 미국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U-505

바닷속에 숨어서 자신보다 훨씬 큰 상대전력에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비대칭 전력이라는 점에서 잠수함은 여전히 매력적인 존재로 꼽히고 있다. 거기에 전쟁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며 적 함대나 수송선을 상대하는 존재에서 소리 없이 접근하여 적진 한 복판에 핵전력을 투사하는 전략 잠수함의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한 마디로 적의 해상 전력만 상대하던 존재에서 국가단위의 적을 상대하는 가장 은밀하고 위험한 무기로 발전하게 된 것.


"어제는 전함이 주력이었고, 오늘은 항공모함이 주인공이지만, 내일은 잠수함의 세상이 될 것이다."라는 체스터 니미츠의 판단이 제대로 들어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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