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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Mar 01. 2016

황천항해(荒天航海)

아버지께 보낸 편지 (1)

우현 쪽으로 신나게 두드리는 높은 물결에 정신줄이 쏙 빠지고 있는데 저희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어느 배가 VHF로 불러옵니다. 


M/V LOWLANDS SUNRISE. 배 이름이 참 맘에 드네요. 300미터 가까이 되는 길이의 CAPESIZE의 벌커인데 라스팔마스로 향하고 있답니다. 이틀 전 강풍에 안테나가 상했는지 지난 2일간 기상도와 항행경보 하나도 받지 못했다며 기상정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할 그 친구들과 우리의 경로가 사뭇 다르기는 하지만 AWT(*주 1)로부터 받은 내용으로 대충 케이프 타운까지의 기상상황을 숙달되지 못한 영어지만 열심히 설명해줬습니다.


너희는 덩치가 커서 그다지 걱정되진 않겠다고 위로를 해줬는데 정말 LOWLAND에서 만든 배인지 열심히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며 불 멘 소리를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서로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면서 무전을 마쳤죠. 

BON VOYAGE. 언제 들어도 참 멋진 말 같습니다.  

멋진 노을을 만나게 되면 다음 날 날씨는 거칠어진다고 봐야한다

그나저나 지금 바다는 ‘조용한 바다 인도양’ 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AWT 메시지에 따르면 저희가 달려가는 코스로 19일까지 GALE FORCE WARNING이라고 하니 당분간은 이렇게 시끄러운 인도양을 달려갈 듯 싶네요. 선속도 덩달아서 떨어져서 10노트 주변을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긴 항해에 세월 보낸다는 말이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듯 싶습니다. 뭐 날씨만 좋고 세월 보내게 되면 그게 더 좋겠지만요.  


오늘도 선내 시간을 한 시간  전진시켰습니다. 지난번 인도에서 출발해서 브라질까지 달려가면서 8시간 30분을 후진했는데 이번 브라질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는 11시간(!)을 전진하게 되죠. 적금을 들었다가 이자까지 다 챙겨서 받아먹는 기분입니다.


지난번 브라질로 향할 때 함께 당직을 섰던 실항사는 브라질  출항하면서부터 일 항 사 당직 시간으로 근무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부실 은행에 돈 맡겼다가 원금도 못 받는 처지 같이 되었다며 인상을 쓰더군요.

뭐 그런 것이 다 뱃사람 팔자 아니겠냐? 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고 올 10월에 1년을 채우고 하선할 마당에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셈 치라고 등 두들겨줬죠.


공연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저만 덕을 본 것 같아 미안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 전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후진 때와 달리 당직이 끝나고 나서도 잠이 안 와서 멍하게 시간 보내다 새벽녘에나 잠들곤 한다는 것입니다. 후진 때는 지쳐서 눕자마자 꿈나라행이었는데 전진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 인 듯 싶네요. ^^ 하여간 주야장천 서쪽으로만 달리는 배만 타다가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타보니 이런 좋은 점이 있긴 있네요. ㅎㅎ   

항해하다가 늘상 만나게 되는 매서운 선수파

광복절이었지만 항해사 일과는 변함없이 그렇듯  그냥저냥 보냈습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광복절(?)이 17일이라고 하던데,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이즈음이 '광복'인 것을 보면 그들의 업이 크긴 큰 모양입니다.  


남의 나라 광복에 지들은 국치에 지진 난리로 여전히 속을 썩고 있으니... 배 타고 들어갈 때는 참 좋은 나라인 것 같은데... 앞으로는 그런 아픔을 주지도 말고 받지도 않는 그런 착한 나라가 되어 주었으면 바래봅니다. ^^   

배는 씩씩하게 풍랑을 잘 해쳐가고 있습니다. 우리 식구들도 이처럼 씩씩하게 늘 건강하고 화목했으면 합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막내..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와 건강이 함께 하길 빌면서. 다시 메일 보낼게요. ^^ 아자아자 아자~!!!   


마다가스카르로 접근 중인 CS DAISY호에서, 둘째 올림.   


*주 1 AWT: WEATHER AND ROUTING COMPANY의 한 회사. 선박에 기상상황과 침로 과정 등을 선박에 추천하여 주는 일로 사업을 하는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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