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 하늘로 날아간 전설, Roberto Clemente
1947년 4월 15일, 역사적인 재키 로빈스의 데뷔 이래 니그로 리그에서 뛰던 흑인선수들은 하나둘 메이저리그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재키의 뒤를 이은 로이 캄파넬라, 사첼 페이지, 래리 도비 등 당대의 스타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열린 문은 히스페닉 라티노라 불리우는 중남미의 선수들에게도 기회가 되기 시작한다.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스페인, 미국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자치령이 되었던 푸에르토리코, 가난한 사탕수수 노동자의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던 로베르토 클레멘테도 그런 선수 중 하나였고 18살이었지만 푸에르토리코 리그에서 출중한 기량을 뽐내며 뛰고있던 그는 재키 로빈슨을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 발굴했던 다저스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미국행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선수로써 데뷔했던 것은 다저스가 아닌 파이어리츠였는데 영화 '42'에서 인종차별로 악명높은 선수들의 무덤으로 그려졌던 피츠버그가 클레멘테의 첫 팀이자, 마지막 팀이었고 그런 그를 데뷔시킨 이가 제키 로빈슨을 데뷔시켰던 다저스의 브랜치 리치 단장인 것도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듯.
17년간 통산 타율 317`, 3,000안타
그는 그라운드에서는 투지넘치는 플레이로 사랑받았지만 사실 그의 캐리어에 투지가 큰 보탬이 되지는 않은 선수였다. 야구에서 타자가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인 선구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끝까지 들었고 통산 타율이 317`였으나 통산 출루율은 359`로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너무 낮았다. 다시 말하면 좋지않은 공에 방망이를 많이 휘두르고 사구는 많이 못얻어내는 전형적인 배드볼히터(Bad Ball Hitter)였던 것. 투수들의 유인구에도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그의 방망이는 데뷔 초기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좋은 어깨와 투지, 준수한 수비능력에 비해 그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피나는 연습으로 바닥을 기던 타율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으로 리그에 적응하고 있던 1961년, 인생을 바꾸어놓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당대의 안타기계이자 타격코치로 이름났던 조지 시슬러는 클레멘테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타격능력의 부족이 자유자재로 쉽게 휘두를 수 있는 방망이에서 기인한다고 단박에 결론내렸고 그가 원래쓰던 방망이 대신에 리그에서 허용되는 가장 무거운 방망이를 그에게 쥐어주게 된다. 이 판단은 대성공으로 이어지는데 시즌 타율 351`로 타격왕까지 거머쥐게 된 것. 이후 그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1972년까지 그의 타율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312`아래로 내려가지 않았고 4차례의 타격왕, 1번 2위에 머무르는 타격기계로의 면모로 일신하게 된다. 1965년에는 내셔날리그 MVP까지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1967년에는 타율 357`23개의 홈런, 209안타 109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1971년, 월드시리즈 우승과 더불어 시리즈 MVP에 오르며 30대 후반으로 달려가는 나이에도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1972년 시즌, 피츠버그는 96승 56패의 내셔널리리그 최고승률로 East Division 선두에 우뚝섰으나 당대의 괴물들로 일컬어지는 Big Red Machine(토니 페레즈, 자니 벤치, 조 모건...그리고 피트 로즈)이 버틴 신시네티 레즈에게 리그챔피언을 내주고 짧은 가을야구를 마쳤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312`의 준수한 타율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1972년 9월 30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 MLB역사상 11번째로 3,000안타 고지에 올라서며 기쁨을 더하게 된다. 38세라는 적지않은 나이에도 그의 방망이는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었고 이후로도 그의 전성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7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1만명이 사망하고 대다수의 주택이 파괴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평소에도 소외되고 불우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자선을 배풀기로 유명했던 클레멘테는 이런 상황을 가만히 보고있지 않았고 두 차례에 걸쳐 모금한 돈과 물품을 니카라과로 보내게된다. 하지만, 당시 니카라과를 지배하고 있던 소모사 정권은 전세계에서 답지한 구호물품을 개인적으로 착복, 유용하였고 이로 인해 국외의 지탄을 받게 된다. 자신이 보냈던 물품도 정작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는 것을 안 클레멘테는 아예 자신이 나서서 구호물자를 실어나르기로 했고 72년의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31일, 그가 준비했던 3번째 구호물품을 DC-7 수송기에 싣고 직접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륙후 얼마되지 않아 비행기 엔진이 화염에 휩싸였고 그대로 바다로 추락하여 클레멘테를 포함한 구호단체 자원봉사자들과 승무원등 5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를 국보처럼 여기던 고국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사고후 3일간을 국민애도의 날로 지정했고 메이저리그 역시 보위 쿤 커미셔너가 원래 사회사업, 모범적인 활동으로 다른 이의 귀감이 되는 이에게 주어졌던 Commissioner's Award를 그의 이름을 따서 Roberto Clemente Award로 바꾸게 된다. 1973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위원회는 원래 은퇴후 5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헌액자를 뽑는 관례를 그에 대해 면제했고 클레멘테는 곧바로 92.69%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미국 우정국에서는 그의 얼굴이 담긴 우표를 발행하였고 주전 우익수를 어이없게 잃어버린 피츠버그 파이러츠도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 Roberto Clemente
"당신에게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 로베르토 클레멘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