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의 냠냠서재 / 조심스럽게 이어폰을 나눠 끼워주듯
★ 고3뿐만 아니라 무엇에든. 어떤 이들에겐 '준비생'이 될 준비도 필요하다고 괜한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p.15)
★ "어려워요. 처음 부르는 것도 어렵고, 다시 불러도 처음 같고."
"알면 됐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돼." (p.82)
★ 조바심이 나지만 너무 빨리 해석하려다 보면 탈락되는 감정들이 생길 테니까. (p.195)
중학생 때 노래를 통해 서로 친해진 이나와 나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서로 다른 반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나와 떨어져서 지낼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어른이 되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래인데요. 그런 나래가 밴드부에 들어간 이나를 따라서 자신도 노래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곡들이 넘어가듯이, 나래와 친구들도 여러 고민을 하면서 다음 계절을 맞게 되는데......
윤혜은 작가님의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입니다. 저로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읽은 '요즘 소설'이었는데요. 오랜만에 읽은 요즘 소설이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걸작이었어요. 표지가 주는 청량함만큼이나 네 인물이 펼치는 파릇파릇한 일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선 이 소설의 장점은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스무 살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지는 않으면서도, 점차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나이대의 고민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이들의 삶과 학교 안과 밖에서 아이들이 보내는 일상은, 마치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나래와 친구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꼼꼼하게, 또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문자 등도 실제 고등학생의 대화처럼 어감을 살리는 한편으로, 적당한 수준에서만 맞춤법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이끈 점도 테크닉의 측면에서 인상적입니다.
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다소 아쉬웠던 점이 두 가지 정도 있는데, 첫 번째는 책의 목차 및 구성입니다. 마치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보듯, 작가는 목차를 '티저', '인트로', '트랙' 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래와 이나 사이의 감정 변화 및 사건의 흐름에 따라 목차에 붙은 분류가 절묘하게 부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플레이리스트가 인트로, 트랙, 아웃트로 정도로만 구분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페셜 트랙', '듀엣' 등등의 다양한 목차 분류가 전체 구성을 다소 산만하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개인적으로는 받았습니다.
예시로, 이 책에서 '인트로' 부분은 '트랙'이라고 분류를 바꾸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이기에, 차라리 지금 '티저'에 해당하는 프롤로그를 '인트로'로 대체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듀엣'은 중요한 파트이므로 특별하게 분류해도 괜찮겠지만, '인터루드 타임', '스페셜 트랙', '히든 트랙'을 따로 설정하고 트랙 사이사이에 집어넣는 시도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읽어나가는 데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어 보였습니다. 몇몇 목차들은 트랙으로 명칭을 바꾸고 배치를 바꾸는 편이, 본 책의 구성을 좀 더 깔끔하게 만드는 데에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인물의 구분입니다. 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특성상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분별이 되어야 이입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나래와 이나는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캐릭터성이 점차 보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등장 빈도에 비해 분별하기가 다소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본래 등장하던 네 인물 이외에 다른 친구들이 몇 명 더 등장하고, 또 그 친구들이 중요한 대사를 던지다 보니, '그래서 이 친구는 왜 이런 얘기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여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이 있으면서도, 이 책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은, 그 나이대에 드는 복잡한 감정과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고등학생들 간의 감정을 억지로 드라마틱하게 꾸며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일상만 보여줌으로써 방황의 감정으로부터 독자들을 도피시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감정, 준비되지 않은 채 어른이 되면서 느끼는 부담감 등 그 시기에 느낄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이 <우리들의 플레이스트>에는 섬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이 서로 건네는 삶에 대한 질문은, 독자들에게 '삶은 이래야 한다'라고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냥 등장인물 개개인의 의견으로 서술될 뿐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건네고 싶은 메시지가 말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이 말들은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고등학생 때 그러했듯, 서로의 꿈과 감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나갑니다. 이러한 서술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작가는 청소년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정의 해소를 강요하지 않고, 단지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외롭지 않게 만드는 건 너무 욕심 같고, 읽는 이가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외로움이 덜 혼자이게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p.206)고 말씀하신 내용이 잘 반영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작가님이 '외롭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를 작정하고 쓰셨다면, 이 책은 무척 부담스럽게 읽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등장인물, 그리고 독자들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작가님이 써낸 여고생들의 일상은, 독자가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풀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뿐입니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 걸 계속하려는 건 멋지고."
"아니, 나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른다니까."
"그런데 하고 있잖아. 계속할 거 아냐? 알게 될 때까지."
"......."
"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닐까? 난 잘 모르지만." (p.142)
잘 모르지만 조심조심 다가가는 태도. 나래가 소영을 보면서 배우고 싶어했던 그 태도가 이 책을 좋은 책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잘 모른다'는 말로, 함부로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겸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치하지 않고 '조심조심 다가가려는' 태도가, 이미 고2를 한참 벗어난 저에게도 많은 울림을 주었네요. 오랜만에 손에 든 요즘 책이 기분 좋은 울림을 선사해 주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이어폰을 나눠 끼워주던, 단짝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네요. 푸른여우의 서재에서 추천합니다.
( * 본 서평은 주니어김영사에서 주최하는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 서평단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