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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Oct 26. 2023

박에스더, <정원의 계시록>

푸른여우의 냠냠서재 / 거친 서사를 둘러싸는 파릇파릇한 세계관

추천 지수는 ★★★☆ (7/10점 : 아쉽다, 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작품을 애정하는 모양)

   ★ "그러니까 괜찮아. 여울이 너는 그냥 네 속도에 맞게, 천천히 걸어서 나에게 오면 돼." (p.33)


   ★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세상을 온전히 이해해 줄 타인을 찾아 평생을 허비하기도 한다는 걸 사유는 나중에 알았다. (p.74)


   ★ 종말이 다가온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포옹뿐이었다. (p.218)


   사유는 짙은 녹색의 산이 내려다보는 첨단 과학 도시, '지혜도시'에 도착합니다. 사고로 4년째 잠들어 있는 쌍둥이 동생 여울을 치료하기 위해서인데요. 한편, 으뜸 정원지기의 자리를 이어받기로 한 여래는, 이곳을 벗어나 자아를 찾고자 합니다. 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유에게 여래는 자기를 대신하여 정원지기를 맡아달라고 하는데요. 여울이를 치료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손에 넣으려던 사유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혜도시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데.......


   짙은 녹색의 산만큼이나 파릇파릇한 세계관

   박에스더님의 <정원의 계시록>입니다. '미래도시'라는 설정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많이 나왔지만, 이렇게 산내음을 물씬 풍기는 미래도시는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몸에 이식하는 칩을 연상시키는 '씨앗'이라는 소재도 참신했고, 그런 소재들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산'이라는 소재가 풍기는 숭고한 분위기와 인공지능, 이식근육 같은 과학적 소재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어 SF 팬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친 서사도 산만큼이나 부드러웠다면

   그러나 기존의 SF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정원의 계시록>도 소재와 세계관에 집중하다 보니 인물의 심리 전개나 서사의 진행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4년 간 식물인간으로 존재했던 여울이라는 인물이 작중 중요한 역할을 행함에도, 쌍둥이인 사유의 감정은 충분히 제시되어 있지 않아 캐릭터가 다소 죽어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109페이지에서 사유가 품어야 할 감정은 '당황'이나 '절망'이 먼저일 텐데도 불구하고,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사례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등장인물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다른 소설보다도 더 많은 궁리가 필요할 듯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산도 보지 못한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뿐이야. 우리 의지로." (p.193)


   이러한 단점을 끌어안고 있는 <정원의 계시록>입니다만 착상이나 주제는 기존의 SF 작품들과 비교해 봤을 때 좀 더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재앙 앞에서 신을 책망하는 주민들의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지혜도시의 비밀도 예측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요컨대 거친 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파릇파릇한 세계관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을 이유는 충분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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