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의 결말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2-3일전 우연히 밀리의 서재에 로그인하여 첫 화면에 떠 있는 책에 마우스를 대고 무의식적으로 눌렀다. 원래도 종종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곤 했지만 그 날은 나의 일정에 변화가 생기며 조금 여유 있는 마음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어떤이가 브런치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였고 그것을 들으면서 나는 그 날 아침에 읽었던 이것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25.01.06
우연히 밀리의 서재에서 고명환 작가의 [고전이 답했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라는 책이 눈에 띄었고 (짙은 녹색 찐한 핑크 연한 초록 색깔의 책이 예쁘기도 했다) 바로 읽기를 나는 바로 눌렀다. 1부의 첫 번째 주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이유 첫 번째 문장에서 작가는 나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는가?'
아. 다행히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그레고르를 만났던 기억 덕분일까? 나는 지체없이 그에게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분명히 조금씩
바로 그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단지 그 스스로 그것을 모른 척 못 본 척 매 순간 그로부터 도망쳤을 뿐.
그럼 다시.
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왜 변했는가.
그리고 왜 다른 것이 아닌 벌레로 변하였는가.
벌레는 대체로 중요하게 취급되는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송충이, 방아깨비, 무당벌레는 송충이, 방아깨비, 무당벌레라고 불리지만 "벌레"는 그냥 단지 벌레다. 그러니까 그레고르는 하다못해 송충이, 방아깨비, 무당벌레보다도 별볼일 없는 대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다시.
왜 그는 별볼일 없는 대상, 하찮게 취급되는 대상이 되었나.
1 그가 그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2 주변인이 그를 그렇게 여겼다.
3 목적이 있었다.
만약 1번 2번이 아닌 3번이라면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만약 분명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그가 벌레로 변한 것이었다면?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참담함을 느낀다.
그의 목적이 내가 하찮은 대상으로 변했을 때 나의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는가? 따위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그리고 그가 만약 대답에 대하여 "그럴 것이다"로 조금이나마 기대했다면. 이건 정말 틀림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는가?
이 물음에 나는 위와 같이 답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무런 필터나 자기검열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 약간 다른 곳에서 출발하고 있다.
왜를 물었는데 나의 첫 마디는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레고르를 실제로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다만 그의 이름은 그레고르가 아니었고 나는 카프카가 1915년 독일(?)의 어딘가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그레고르 잠자를 1998년 대한민국에서 보았다.
기억나지 않는 단 한 가지는 도대체 그가 언제 그 흉측한 벌레로 변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위에서 1998년이라고 했지만 사실 더 이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늘 방에 있었다. 다행히 그가 기거하는 그 방은 특별히 좁지 않았고 발코니 창도 있어 어쩌면 환기도 종종 그가 원한다면 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화장실까지 달렸으니 어쩌면 완벽하다.
2025년 1월의 나는.
그때, 그리고 그때의 그, 그리고 그때의 그들, 어쩌면 우리. 를 떠올려 본다.
그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을까. 정말 나의 답변처럼 그 스스로 아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정말 나의 답변처럼 그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른 척 하는 것을 택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한 마리 흉물스러운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 <변신> 제 1장
내가 만난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변함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도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우리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느낀 충격이라기보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새 당연한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제 한 곳을 주시하며 길을 걷는데 빛바랜 주황색 단풍나무잎들이 뒤덮인 바닥이 단 몇 걸음을 두고 꽤 길쭉한 모양의 솔방울들이 듬성듬성 놓여져 있는 풍경으로 한 순간 변모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당연하게도 솔방울들 바닥 위에는 소나무들이, 단풍나무잎들 위에는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 그 옆에 길게 놓인 장롱. 그리고 구석에 화장대. 이렇게 3개의 가구가 그와 있었다. 아마 문을 열어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그는 대게 침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신경을 문 밖에 두었다. 눈은 문 밖을 응시하고 코는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를 이따금 킁킁거렸고 그 곳에서 가장 쓰임이 많았던 귀는 매일 매순간 그가 있지 않은 곳의 소리들을 듣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윽고 그가 들을 수 있는 아침의 소리들이 모두 사그러들면 그는 거의 곧바로 방문 손잡이를 돌리고 방의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한 장소에서 이 모든 것들은 곧바로 어색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사실 그렇다고 하여 나머지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 하였다 라고 표현하기도 꼭 들어맞진 않다)
그런데 그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를 만나버린 날. 나는 속수무책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집이라는 공간의 규칙에서 벗어난 집 밖의 어느 곳. 그를 우연히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때 나는 동공이 커지고 발바닥까지 식은 땀이 난 채로 황급히 한쪽으로 몸을 홱 돌려 그저 그가 그곳에서 사라지기만을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혹시라도 그가 나를 보았을까? 그는 중년이 되어서도 안경을 쓰지 않는 자신의 눈의 성능을 자랑하곤 했었다.
언제까지 우리는 식탁에서 함께 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식탁에서 함께 하지 않았을까?
투명하고 반듯한 사각유리로 덮여 있던 우리집 식탁은 3면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의자는 3개가 놓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나와 남동생을 포함하여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함께 길을 나섰다. 수개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전차 안에는 그들 뿐이었으며, 따스한 빛이 안으로 비쳐 들고 있었다. (중략) 이윽고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레테는 가장 먼저 일어나 젊고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잠자 부부의 눈에는 마치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보증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프카 [변신]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이지 않았으나 그것을 공적으로 공표하고서는 서로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20대가 된 내가 집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다 오랜만에 찾아간 곳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장소, 새로운 거실, 새로운 방, 새로운 침대, 새로운 쇼파, 새로운 식탁, 새로운 접시, 새로운 수저.. 집의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새로움으로 탈바꿈 하였다. 내가 알던 모양은 다만 그녀 뿐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의 잘못이라곤 불안한 꿈을 꾼 것 뿐. 내가 본 그레고르는 아주 미세하긴 하여도 조금씩 계속 달라지고 있었다. 그 자신의 모습이.
다시 말하면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가 된 것을 그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나 내가 말한 그레고르는 어쩌면 그 스스로 자신이 그것으로 되는 것을 선택하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지의 차이가 있음은 명백하다.
2025년의 나는 1915년 그레고르, 1998년 그레고르를 지나 2025년 그를 또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내가 그를 선택했던 이유들 중 그의 어깨.
뒷모습이 찍힌 그 사진 속 그의 어깨.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사진 속 그의 모습, 그 어깨를 이렇게 다시 떠올리기 전까지 정녕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추호도 나의 시절 속의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을 나의 배우자로 스스로 선택했을리는 정녕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나를 그 골목길을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찍게 하였는지 아님 아무 뜻 없이 습관처럼 찍었는데 나중에 본 모습에서 그런 것들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릴 적 언젠가부터 그 방에 있는 그에 대하여 가여워 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황들에 대하여 나는 애를 쓰지 않았다.
다만 권위를 잃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좋아합니다. 힘없고 불쌍해서 좋아요. 나는 힘있고 당당한 사람보다 힘없고 불쌍한 사람이 더 좋아요.”
드라마의 어떤 대사가 떠오른다. 그때는 조금의 공감 없이 그저 흘려들은 말들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때 이렇게 말한 남자 주인공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 시절 그에게 어쩌면 아주 조금은 측은지심 같은 게 있었을까. 그 모든 상황들은 얽히고 얽혀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쩌면 아주 조금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역시나 그레고르가 사과를 맞고 곧 숨이 멎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을까.
카프카의 변신을 모티브로 한 어린이용 그림책 Beetle Boy에서는 아이가 벌레로 변하는데 가족들이 위로하며 끌어 안고 결국에는 다음 날 아이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나는 그렇다 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지의 문제라면 말이다.
그레고르가 자의든 타의든 벌레든 무엇이든 다른 형태로 “변신”하였다면 그는 다시 그 다른 무엇으로도 다시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레고르의 여동생이 처음처럼 그를 위해 훌쩍이기를 청소해주기를 마음을 써주기를 멈추지 않았다면, 그레고르의 결말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그레고르를 보고 있다. 만약 그가 무심히도 창백한 필경사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결심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선택한 그의 결말은 이전의 결말들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