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족보와 직업과 성격과 취미와 첫사랑과 성적취향과 정치적 성향과 부모의 과거와 비자금과 사주팔자와는 크게 상관없이 단지 너의 다음 행동에 내가 주목하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바람 혹은 요구의 표현이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은행직원이 나를 275번 고갱니임, 하고 부를 때 보다 오히려 더 공허한 호명일 수도 있지. 네가 혹시라도 나의 이름으로 나를 떠올려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네가 이해하는 만큼의 나를 그 이름 속에 담아 버무리고 흔들어 섞어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고 때로는 네 취향에 따라 약간 혹은 다소 지나치게 채색하여 모습을 갖게 된 어떤 것일테고 그 형상은 어쩌면 나의 평소 행실과는 무관하게 네가 누구냐에 따라 나와 유사할 수도 있고 나와는 거의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너는 그런 건 애초에 신경 쓸 의향이 전혀 또는 대체로 없었을테고 나는 너에게 비친 내 모습 따위 상관없다고 짐짓 허세 부리면서도 사실은 연출된 미소와 계획된 겸손까지 동원하여 정성스럽게 다듬어 내 이름에 붙여 놓은 "나"라는 상이 어디서부터 안 먹혀드는지 알고 싶어 전전긍긍 하겠지. 어떤 때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라고 흔히들 얘기하지. 그건,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와 인칭을 달리한 동어 반복이라 생각해. 네가 나를 알고자 하면 나는 분명 너에게 탐구의 대상이어야 하고,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도 너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나를 집요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거야. 알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면 조작이란 것도 가능하고 좀 더 순하게는 편집과 위장도 가능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심리적 과정이나 인지 기전, 뭐 이런 거는 아예 무시하고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내 이름 안에 들어있는 나의 형상은 내가 나의 이름을 걸고 나름 엄선해서 발산하는 나와, 네가 너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때로는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채색해 놓은 나 사이에 겹쳐지는 부분이라고 합의를 보는 거지. 그러면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가 아는 나와 내 이름으로 떠올려지는 네가 아는 내가 현저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무조건 너의 탓도 아니고 나의 탓도 아니게 되니까 그나마 실망이나 후회 없이 나와 나 사이의 거리라는 문제를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