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책임감

2026.03.12

by 이자영

어느 순간부터 씻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아졌다.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나가기 전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는 것이 매일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서 씻지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출근한 적도 종종 있었는데. 이제는 이 모든 과정이 그리 힘들지 않다. 어젯밤에는 새벽 1시 반까지 방 청소를 했다.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던 책상을 싹 치우고 작년에 멈춰 있던 블럭 캘린더를 3월로 다시 조립했다. 먼지가 쌓인 바닥을 청소하고 창문에는 밝은 색 커텐도 달았다. 마지막으로 베이지색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버리고, 최근 새로 사서 세탁해둔 침구를 깔았다. 흰색 배경에 검정색 세로 선이 있는 디자인. 모든 청소를 마치고 다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포근한 감촉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함께 사는 친구가 내 방을 보더니 농담을 했다. ‘이거 일주일도 안 갈 걸?’. 나는 웃으며 긍정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일주일보다는 더 길게 깨끗한 방을 유지해보겠다고.

최근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이 들었던 계기는 지난주에 상담 선생님과 했던 통화에서 들었던 한 마디였다. ‘저는 그를 상처 입히지 않죠’라고 말한 나에게 선생님은 정말 그럴 것 같냐고 되물어보셨다. 정말 순식간에 오갔던 대화라서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통화를 마친 후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왜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을까?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논리인데. 누군가가 나로 인해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걸 왜 인지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지? 그리고 이어진 생각은 이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스스로 상처 입지 않으려고 극도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반대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조금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어쩌면 의사 선생님이 자주 말하셨던 ‘양면성’, ‘입체성’ 등도 이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은 양면적이고 입체적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을 나보다는 주로 타인에 적용해서 받아들였다. 가족도, 치료자들도 모두 입체적인 사람이야. all good 나 all bad는 없어. 그리고 이제서야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끊임없이 좋은, 선한 사람으로만 남고 싶어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가진 입체적인 인간이니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도 타인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이 좋은 영향이든 안 좋은 영향이든. 이 문장을 써내려가는 순간 조금은 무서워졌다.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책임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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