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언불가의 울림 '버닝'
청년(靑年)이라는 단어를 아주 단순히 직역하자면 ‘푸른 나날’들 쯤이 될 테다. 그리고 이 푸르다는 색감이 주는 생동감 탓인지 청년이라 불리는 시기는 늘 낭만적인 때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쯤 늘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곤 한다. 청년은 정말 낭만적인가? '버닝'은 그 푸른낭만의 실체를 가감 없이 들여다보는 영화다.
‘버닝’(감독 이창동)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의 하루하루를 조망한다. 배달을 다니던 그는 우연히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대뜸 자신이 아프리카에 여행을 갔다 오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그곳에서 만난 남자 벤(스티븐 연)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어느 날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고백한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부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자신의 작가관을 확고히 다져왔다. 그의 작품엔 늘 어딘가에서 혹은 누군가에게 버려진 인물들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찾으려 각자의 방식(폭력, 사랑, 종교, 문학 등)으로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들의 사연을 통해 관객들 스스로 반성하게 하고 주위를 돌아보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버닝’도 역시 앞선 작품들과 유사한 듯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번엔 청년들의 현실로 눈을 돌렸다. 영화 속 세 청년은 각자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뇌한다. 종수는 좁은 골방 안에 틀어박혀 자유를 꿈꾸지만 막상 바깥을 향할 의지도, 용기도, 돈도 없이 정체해 있다. 또 해미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늘 자유를 향해 걸음을 내딛고, 벤은 부와 자유 모든 걸 다 갖춘 듯 보이지만 계속 즐거움을 찾아 헤맨다. 이들은 모두 이면의 무기력함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영화는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건 “카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은 두 종류의 굶주린 사람이 있대. 리틀 헝거(Little Hunger)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 난 그레이트 헝거가 될 거야”라는 해미의 대사다.
해미의 대사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화는 ‘리틀 헝거가 되지 말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자’는 뻔한 메시지를 품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미 영화 속 세 청년들은 모두 밥보단 자유와 꿈과 재미가 더 중요한 그레이트 헝거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버닝’은 비어있는 삶의 의미를 채우려 비뚤어진 감정에 집착하는 그레이트 헝거 청년들의 고통을 차분히 소묘한다. 그 고통은 관객들도 모두 현실에서 겪었던 것들이기에 영화-관객은 감정적으로 연동된다.
‘버닝’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때 그들의 고통을 직접적인 대사나 연기를 통해 드러내지 않고, 연출로써 관객들 스스로 느끼게끔 만드는 방식을 쓴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하는 종수의 얼굴을 화면 한구석에 박아두면서 그의 억눌린 욕망을 표출한다거나, 종수-해미-벤 세 사람의 자리 배치를 변화시키면서 관계의 원근을 나타내고, 종수와 벤을 한 화면 안에 잡을 때 사물을 이용해 칸을 나눠버리는 식의 디테일한 미장센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런 세세한 설정들을 통해 관객들은 영화를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아도 발끝에서부터 울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떨림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은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세 배우다.
영화는 두 가지의 장르가 혼합돼 있다. 초중반부까지는 세 인물의 묘한 관계로 인한 팽팽한 심리극의 느낌, 해미가 사라진 후반부엔 “벤이 해미를 감춘 건 아닐까?”라는 종수의 의심이 시작되면서 미스터리 스릴러의 분위기로 전환된다. 다소 상반된 장르를 오고 가는 건 연기하는 입장에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세 배우는 흔들리지 않는 연기를 이어가며 ‘버닝’의 매력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특히 신인답지 않은 대범함으로 선배들에 꿀리지 않는 면모를 선보인 전종서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닝타임 2시간28분. 청소년 관람불가. 17일 개봉.
에디터 신동혁 ziziyazizi@sli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