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투사 ‘안중근’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의 숨은 주역이 있다. 극 중 명성황후의 마지막 궁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설희 역을 맡은 뮤지컬배우 정재은(28)이 그 주인공이다. 무대 위에서 뛰어난 몰입도의 연기와 풍부한 가창력을 동시에 선보여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그녀를 봄기운이 묻어나는 늦겨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마주했다.
“‘영웅’, 무대 서기 무서웠다”
뮤지컬 ‘영웅’은 과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쳤던 운동가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안한 현 시국에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무대에서 그려내 관객들의 가슴에 짙은 발자국을 살포시 찍어낸다. 그 때문에 정재은을 비롯한 출연 배우 모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처음엔 ‘영웅’의 무대에 서는 게 무서웠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감히 내가 역사 속 그들의 이야기를 표현해도 될까라는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대부터의 역사적 사실을 심도있게 공부했는데, ‘지금껏 이토록 중대한 일들을 깊게 느껴보지 못하고 살았구나’하는 반성도 했다. 때문에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종종 가족 단위의 관객이 찾아 객석을 채워주고 있을 때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영웅’에서 그녀가 맡은 설희 역은 과거 실제로 존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모티프로 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캐릭터를 그려내고 연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 내가 내린 결론은 가상인물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실제 국가를 위해 싸웠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에 고스란히 빙의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덕에 지금은 설희가 가상으로 존재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이 모두 독립 운동을 함께한 동료처럼 느껴진다. 그 정도로 몰입했다.”
“정재은의 설희? 두려움없이 덤비고 보는 성격 반영”
‘영웅’의 설희 역에는 가수 겸 베테랑 뮤지컬 배우 리사와 걸그룹 쥬얼리의 전 멤버이자 뮤지컬로 활동영역을 확장 중인 박정아가 함께 캐스팅됐다. 세 명의 설희 중 막내인 정재은은 각각의 설희가 가지는 매력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리사 언니는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명성황후를 지켜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박)정아 언니는 꿈에서나 상상하던 예쁜 설희의 모습 그대로를 탄생시켰다. 내가 연기하는 설희에는 뭐든 덤비고 보는 성격이 반영된 덕분에 연기,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두려움 없이 표현하는 매력이 있다.”
정재은은 극의 초반부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이하 ‘황후마마여‘) 넘버에서 농축된 깊은 감성과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줬으며, 후반부에는 아름다운 열차신으로 극 최고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황후마마여’에 임할 때는 조심스러웠다. 자칫하면 극에서 설희라는 인물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묻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를때는 과거를 회상하며 슬픔을 담기 보다 일본으로 떠나 독립운동 임무를 완수하려는 견고한 마음가짐을 표현하려 애썼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열차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놓치 않는 인물의 굳은 의지를 녹여냈다.”
뮤지컬 ‘영웅’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적인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의 삶이다. 이를 표현해야 하는 배우의 역할 역시 막중한데, 현재로서는 정성화, 양준모, 안재욱, 이지훈 등 총 4명의 안중근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정성화 선배는 마치 옆집에 있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인데 무대 위에서 화려한 역량을 펼치는 모습이 놀랍고 동경심이 든다. 양준모 선배는 정말 말 그대로 ‘위인’같아서 쉬는날 공연을 보러 찾아간 적도 많다. 안재욱 씨는 독립운동가, 어머니의 아들, 누군가의 동지라는 다양한 모습이 모두 드러나는 점이 신기했다. 이지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안중근의 비주얼이다. 너무 잘생기셨다.(웃음)”
“뮤지컬 자체가 노는 것”
뮤지컬 배우 정재은은 2013년 ‘몬테크리스토’, 2014년 ‘해를 품은 달’ ‘태양왕’ ‘모차르트’ 2014~2015 2월까지 ‘올슉업’, 2016~2017 ‘더 언더독’, 이후 ‘영웅’까지, 약 3~4년간 거의 쉼 없이 달려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힘든 내색은커녕 오히려 “더 하고 싶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안 힘들다. 나한테는 뮤지컬 자체가 노는 걸로 느껴진다. 지칠 틈이 없다. 계속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따름이다.”
가끔씩 주어지는 휴식시간에는 무엇을 하며 보내냐는 질문에는 “집에서 소소하게 마늘이나 고구마 같은 식물을 다듬는 걸 좋아한다. 대부분의 뮤지컬 배우들이 그렇듯 무대에서 쓰는 에너지가 크다보니 나 역시 소박한 취미생활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아버지 영향 받아 평생 바이올린에 전념할 뻔”
줄곧 뮤지컬 배우로서의 미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을 것 같은 그녀의 삶은 의외로 다사다난했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나를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우려는 열의가 강했다. 중학교 때는 유학도 보냈는데, 거기서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가수를 꿈꾸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저 음악에 취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뮤지컬이란 걸 알고 꿈을 키워가는 와중에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시기였는데, 아버지가 바이올린 예고에 들어가면 뮤지컬을 시켜준다고 해서 입학했다. 그런데 이후에 아버지가 그런 기억이 없다며 바이올린을 전공하라고 밀어붙이자 난생 처음으로 ‘안 하겠다’는 말을 내뱉고 모질게 혼났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셨는지, ‘자신있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당당하게 ‘자신있다’고 대답했다. 이후엔 집안 반대 없이 준비할 수 있었고,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다음 동국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갔다.”
“연기 전공이 오히려 뮤지컬에 도움”
그녀는 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성악을 전공해 출중한 노래 실력을 겸비한 사례와는 달리, 연기를 전공했음에도 뛰어난 가창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노래도, 연기도 아직 부족하다”며 겸손하게 운을 뗀 뒤,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성악과가 아니라 연극학과를 택한 이유는 노래를 정말 못했었기 때문이다. 또, 정신없이 입시를 준비해 입학한 탓도 탓도 있다. 졸업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좋은 성악 선생님들께 노래를 배웠고, 스스로 많이 노력했다. 머릿속에서 내가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마다 매번 내 모습을 촬영해 비교하면서 훈련했다. 아침 일찍부터 새벽까지 연습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연습벌레’라는 말을 하기도 하더라."
“연기는 학교를 통해 많이 배웠다. 4년 내내 극장이라는 곳에서 생활하는 경험 자체가 큰 밑바탕이 됐다. 결과적으로 평소에는 음악을 가까이 접하고 연기는 대학에서 4년 동안 깊게 배운 것이 뮤지컬 배우로서의 역량을 갖추는데 도움이 됐다.”
“무대 뒤에서 더 아름다운 배우 되고 싶다”
미래의 정재은이 갖는 뮤지컬 배우로서의 지향점과 활동 계획에 대해서 묻자 그녀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품었던 롤모델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대답을 내놨다.
“어렸을 때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인 레아 살롱가와 보컬리스트 셀린 디온의 여성스러우면서도 지혜롭고 강단있는 느낌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들처럼 되려 했다. 다만 요즘에는 단지 무대 위에서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뒷면에 가려진 인간적인 모습이 더 아름다운 배우가 되고 싶다.”
“주위에 그런 인물을 찾아보자면 함께 공연하고 있는 양준모 선배다. 평소 모습 자체가 현실감과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보니 어떤 무대에서든 역량을 펼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앞으로는 뮤지컬 선배들의 말처럼 대극장과 소극장을 겸하며 활동하고 싶다. 일단 ‘영웅’이라는 큰 작품을 맡아 스스로 우쭐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소극장에 가서 소소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풀어낸 작품에서 열연하고 싶다. 그런 것들이 결국 미래에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든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내공을 갖춘 배우가 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마치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배우, 그런 걸 담아낼 수 배우가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신년을 맞아 새해 소망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영웅’을 통해 많이 배우고 각성했다. 과거 독립투사들에 비하면 여전히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이 해가 끝날 때까지 스스로 끝없이 겸손했으면 좋겠다.”
사진=지선미(라운드테이블)
인턴 에디터 권용범 yongko94@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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