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 이병헌, 목마를 관객 위해 우물 파다-②
웰메이드 감성 영화 '싱글라이더'가 따스한 햇살처럼 스크린에 내려앉았다. 전작 '마스터'와 현저히 대조적인 캐릭터를 입은 이병헌은 호주 거리를 정처없이 거니는 비운의 가장 재훈 역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해줄 준비를 마쳤다. 영화 개봉을 앞둔 20일,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이병헌을 만났다.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거라며 '싱글라이더'를 소개하는 그의 눈빛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싱글라이더'는 극중 재훈의 심리와 감정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영화다. 아주 미세한 감정 변화와 근육의 떨림까지 놓치지 않고 섬세히 연기하기 위해, 매 장면마다 꼼꼼한 모니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사가 많이 주어지면 내가 지금 연기하고자 하는 장면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어요. 하지만 표정만으로 감정 상태를 전달해야 할 때,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온전히 감정 몰입을 잘 했다 하더라도 혹여 화면에선 그 감정이 왜곡돼 보일 때가 간혹 있거든요. 그런 걸 체크하기 위해 모든 장면마다 유심히 모니터링을 했던 것 같아요. 표정과 감정이 정말 중요한 영화잖아요."
한국에선 모니터를 하는 게 거의 일반화 돼 있는 반면, 할리우드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다. 이제껏 배우 생활을 하면서 촬영 후엔 모니터를 하는 게 습관이 들어있던지라 초반 할리우드에 적응하는 게 다소 어렵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스탭들도 배우들도 다 모니터 앞으로 모여서 체크하고, 한 장면을 몇번씩이나 돌려보잖아요. 근데 미국은 안 그래요. 제가 생각하기에 반 이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잘 안 보더라구요. 배우도 연기 끝나고 모니터 앞까지 가서 굳이 보진 않는 것 같구요. 배우들은 '내가 감독님을 믿으면 믿고 가는거지 뭐' 이런 느낌으로 의존하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처음에 약간 답답했지만, 결국 나중엔 적응을 했죠."
얼마 전 미국 유력 언론사인 'USA투데이'가 '주목, 할리우드: 아시안배우 정당한 대접을 해줘야할 때'라는 타이틀 아래 뽑은 11인의 동양인 배우에 선정됐다.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분위기 가운데 배우로서 인정받은 점은 기쁘지만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외가 친척들이 미국 전역에서 여럿 살고 있거든요. 어느날 이모가 'US투데이' 전면을 찍어서 보내주시더라구요. 보고나니 기분이 좋았죠. 업계에서 인정을 조금씩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좋기도 했지만, 더 잘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시에 살짝 부담스럽긴 하더라구요. 저기에서 나란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긴장이 되기도 했어요"
한국 배우들에 향한 국제적인 기대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최근 동료배우 김민희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듯, 국내 여성 배우들은 명망 높은 3대 해외 영화제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는 편. 반면 남성배우의 해외영화제 수상 기근에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분위기다.
"강수연, 전도연, 김민희 씨 전부 훌륭한 연기를 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저는 굳이 남자와 여자를 나눠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남자 배우들이 해외 수상 기록이 없는 건 여성 배우들과 달라서라기 보다는 그저 우연 같아요. 남성 배우들에게도 조만간 어디에선가 좋은 소식이 생기지 않을까요?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영화가 호평을 얻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다 보면 결국 하나가 꼭 터질 것 같단 예감이 든단 말이죠"
여성 배우들이 해외 영화제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국내 영화계가 여성 배우들에게 박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듯, 영화계가 특정 장르나 특정 배우들에 쏠려있는 현상이 피부로 와닿을 때엔 따라붙는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 명의 배우이기 전에 자신 또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었다.
"영화의 다양성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저 역시 관객 입장에서 '나도 사실 목말랐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배우든 영화 장르든 너무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 같은 편향성이 느껴지죠. 관객들에게 울림이 큰 영화는 이미 어쩌면 너무 멀어졌을 수도 있겠다… 만약 관객들이 새로운 얼굴의 배우들을 선택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장르라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상황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등장한 '싱글라이더'와 같은 영화를 재미없어 하시는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어떤 분들께는 분명 인생 영화로 꼽힐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요."
사진 : NEW,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에디터 이유나 misskendrick@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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