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되지 않는 베테랑
김윤진(43)이 국내에선 자주 접할 수 없던 하우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귀환한다.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영화 '시간위의 집'(감독 임대웅)은 따스한 봄 날씨와 상반되는 서늘함으로 스크린을 장악할 예정이다. 개봉(4월5일)을 앞두고 지난달 29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윤진을 만났다. '월드스타' 명성에도 솔직하고 소탈한 이야기가 이어지며 공간이 미열로 채워졌다.
'시간위의 집'은 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죄목으로 2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여인 미희가 살인 현장이 된 집에 돌아와 영적인 존재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우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디 아더스' '컨져링' 등을 통해 친숙해진 장르다. 하지만 할리우드 작품들과는 차별점을 심어 놓았다.
"데뷔 20년이 됐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진짜 드물어요. 굉장히 신선해서 단숨에 읽었고, 바로 결정했어요. 한국영화다보니 좀 더 부각시킨 건 아무래도 가족애죠. 결국 모성애. 애틋하고 애절하니 우리 정서상 굉장히 적합한 스토리가 아닐까 싶어요. 그냥 재밌었다는 걸로 그치지 않고 무게감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그걸 오버하지 않고 적절히 요리를 했죠."
집이라는 공간이 전달하는 중압감을 중점으로 펼쳐지는 영화인만큼 집이 주는 공포는 어마어마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적산 가옥은 내부 구조가 미로처럼 구성돼, 러닝타임 내내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을 안겨준다. 주된 촬영장이던 충남의 한 시골집은 추운 겨울 기이한 분위기를 퍼뜨리곤 했다.
"겨울에 촬영했어요. 그 집은 희한하게 밖보다 안이 더 추웠어요. 양말을 세 겹 신어도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거든요. 보일러를 틀어도 그 집만 들어가면 스태프들이 너무 춥다며 밖에 나가더라구요. 분장 때문에 화장실 앞에 있는 골방을 사용했는데 가방이나 대본, 노트 등을 놔두곤 했어요. 가끔 밤에 들어가면 불이 꺼져 있을 때 무서워서 깜짝깜짝 놀랐죠. 창도 많고, 나뭇 바닥이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삐그덕삐그덕 거렸고. 그런 게 연기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미희는 첫째 아들이 실종되고 둘째 아들은 익사한 비운의 엄마다. 감정 소모가 큰 역임에도 김윤진의 강점인 '절제'가 이번 영화에서도 도드라졌다. 과도한 몰입보다는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충족시키고 그 이상은 잘 넘지 않는다. "감독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배우겠다"는 말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감독님이나 대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전하는 배우 같아요.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과열되지 않아 보이게 노력했어요. 너무 감정적이면 관객들 어깨만 결리잖아요. 최대한 현실적인 이야기가 투영돼서 프로젝션처럼 내가 비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나를 중점적으로 비춰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연기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연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캐릭터를 끌어 당기기보다는 내가 다가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다만 노역 연기는 '국제시장'(2012) 때부터 어려운 과제였다. 이번 영화에선 평범한 가정주부이던 1992년의 미희와 비극의 세월 속에서 침묵한 2017년의 노인 미희를 상반되게 연기해야 했다. '국제시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정교한 설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노인 캐릭터를 구축해낼 수 있었다.
"그때 절실히 느낀 건 영화의 노인과 현실의 노인은 다르다는 거예요. 나문희, 김혜자 선생님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오히려 카랑카랑하고 톤이 높지 않나요? 목소리 연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대본에 없던 후두암 설정을 제안했어요. 핀 마이크를 설치해서 거친 호흡을 많이 냈고, 감정 신에선 내 목소리가 나오다 보니 후시 처리를 조금 했죠. 후두암 설정은 30년 형을 받은 미희가 5년 일찍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계기도 되고, 목소리를 현실감 있게 낼 수 있는 잔머리였어요"
"악역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저런 나쁜X 같은! 저런 게 다 있어? 이렇게 욕이 확 나올 정도로, 꿀밤 제대로 먹이고 싶은 그런 역할. 너무 잘할 자신이 있는데… 두꺼운 목소리다보니 진실을 얘기해야 될 목소리 같아 보이는지 악역이 자주 들어오지는 않네요. 근데 이 목소리로 사기를 치면 정말 소름 끼치지 않을까요? 착한 척하다가 뒤통수 치는 악역, 재밌을 것 같아요"
'스릴러 퀸' 명성에도 마음에 드는 악역 캐릭터는 들어온 적 없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대신 멜로 주인공은 어떠냐는 질문을 하자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최민식 선배님이 몇 년 전에 농담으로 '윤진아, 우리도 진한 멜로 한번 하자'라고 하셨거든요. 다들 막 웃더라고요. 그래서 '오빠! 우리가 멜로 하면 아무도 안 보러와요. 오빠가 아주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랑 멜로를 찍으면 볼 테고, 나는 무지 잘 생긴 연하남과 하면 보겠죠!'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멜로 하고 싶죠. 진짜 막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진한 멜로 하고 싶어요. 옥택연 씨랑은 어떠냐고요? 너무 친해져서 안돼요!(웃음)"
'시간위의 집'은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로 시작돼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선사한다. 25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지난날을 반추해 보는 기회를 경험했다. 영화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그는 언제로 가장 돌아가고 싶을까.
"굉장히 많죠. 근데 이젠 상관이 없을 것 같아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과 노하우가 담긴 이 정신 그대로 가져가서 30대에 머물면 최고일 것 같은데 불가능하잖아요. 여자는 31살 때 제일 빛나는 것 같아요. 20대엔 불안했어요. 당당하지 않않고 자신감도 없었죠. 31살은 충분히 성숙하면서도 가능성이 무한한 나이였고요. 하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전 지금의 제가 더 성숙하고 나은 사람 같아서 좋아요."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로 데뷔, '쉬리'(1998) '밀애'(2002) '6월의 일기'(2005) '세븐데이즈'(2007) '하모니'(2009) '이웃사람'(2012) '국제시장'(2014)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 '미스트리스' 등에서도 활약하며 월드스타로 바쁘게 지내온 그에게 2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배우라는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미국 활동으로 인해 한국에서 공백기가 많았기에 롱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20대 관객들한테는 제가 신선한 마스크였을지도 몰라요. 늘 봐오던 얼굴이 아니니까(웃음). 저는 기회가 된다면 '하모니'에서의 나문희 선생님처럼, 어느 순간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해도 영화처럼 보이는 배우가 되길 바래요. 당시 촬영할 때 선생님이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계셨는데 정말 '영화다' 싶더라고요. 그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게 제 욕심이에요"
사진= 페퍼민트 앤 컴퍼니 제공
에디터 이유나 misskendrick@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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