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몸에 새겨진 피로
휴대폰이 떨렸다.
은행 앱 알림이 화면을 밀어 올렸다.
정산 입금: 5,800,000원
민수는 입금 내역을 확인하자마자 자동이체 목록을 띄웠다. 차량 할부, 보험료, 유류비 카드값, 통신비, 월세, 정비비 잔금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잔액이 멈췄다.
잔액: 4,006,200원
“그래, 이번 달은 버텼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보통이면 한 달에 380만 원 남짓 들어오지만, 이번 달은 정말 많이 뛰었다. 자동이체가 지나간 자리엔 약 400만 원이 남았다. 몸은 부서진 듯해도 마음 한편이 가볍게 놓였다.
터미널로 들어서자 자동 컨베이어의 낮은 윙윙거림이 공기를 두드렸다. 바코드 스캐너가 깜빡이고, 박스는 각 구역 앞에 ‘탁’ 하고 멈췄다. 민수 자리에도 상자들이 빠르게 쌓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미는 감각을 살려 한 줄씩 가지런히 옆으로 돌렸다.
맞은편에서 최 기사가 모자를 뒤로 젖히며 말을 걸었다.
“민수, 오늘 네 구역 꽤 붙었다? 지도 보니까 점이 촘촘하네.”
민수가 앱 화면을 힐끗 보여줬다.
“어제보다 조금 더요. 형네는요?”
“우린 어제만 못해. 대신 빌라 위층이 많다. 발목 조심해.”
박 기사가 박스를 들어 올리며 툭 던졌다.
“단속 뜬대. 이중주차 걸리면 벌금 세다. 다들 앞뒤로 살짝만 비켜 놔.”
민수가 짧게 받았다.
“네. 빨리 싣고 흩어지죠.”
각자 자리 앞에 쌓인 박스를 순서대로 차량에 올렸다. 띠지로 묶인 냉장 박스는 한쪽으로, 작은 완충봉투는 앞 좌석 뒤 포켓으로. 메인 구역을 먼저 돌고, 사이드 골목은 오후로 미루며 경로를 다시 잡았다. 앱 지도 위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자 출발음이 짧게 울렸다.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차를 내보냈다. 터미널 입구를 빠져나오며 민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정렬했다.
오전 햇빛은 차창을 통해 바로 팔목에 내려앉았다. 첫 주소지는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지만 계단은 익숙했다. 상자 모서리를 팔꿈치로 고정해 문 앞에 내려놓고, 앱 카메라로 인증 사진을 찍은 뒤 완료 버튼을 눌렀다. 안쪽에서 아이 울음이 어렴풋이 들리다 조용해졌다. 문틈으로 “수고하세요”라는 작은 목소리가 흘렀다. 민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었다. 문 앞 보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몰라 수취인에게 잠깐 연락해 출입을 돕고, 다시 문 앞에 두고 사진. 한 건물에서 두세 건이 겹치면 엘리베이터를 놓치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빌라 복도는 낮부터 뜨거웠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 층계참에 서면 땀이 금방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잠깐 차 안에 앉아 물을 길게 마셨다. 핸들 표면이 달궈져 있었다.
점심은 근처 빵집에서 크림빵과 단팥빵으로 때웠다. 계산대에 서 있던 여사장이 고개를 들어 웃었다.
“요즘도 바쁘지?”
“네, 이번 달은 좀 몰렸어요.”
“근데 오늘 표정이 좋다?”
민수가 빵 봉투를 받아 들며 웃었다.
“정산이 들어왔거든요. 자동이체 다 빠지고 400만 원 정도 남았어요. 그 생각하니까 숨이 좀 쉬어져서요.”
“고생했네. 물병 하나 더 챙겨 가.”
오후 배송은 자잘한 건들이 길게 이어졌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몰라 다시 연락하고, 현관 앞 반려견이 먼저 반기는 집에선 문과 거리를 두고 잠깐 허밍을 하며 기다렸다가, 문틈이 닫히면 그제야 문 앞에 내려두고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짖지 않았다. 무더운 복도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바람처럼 스쳤다.
해가 기울 무렵, 앱 상단에 남은 점이 많이 줄었다. 마지막 상자를 문 앞에 두고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자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터미널로 돌리려다 민수는 핸들을 조용히 틀었다. 차는 습관처럼, 처음 신비한 물을 받은 날의 그 골목으로 향했다.
‘장 씨 고서점’ 간판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다. 민수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다. 오래된 경첩이 조용히 긁혔다. 문이 열리자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왔구먼.”
목소리는 편안했고, 표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서점은 어둡지 않았다. 낮은 스탠드 하나가 책 등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만 움직여도 종이 냄새가 가볍게 따라왔다. 노인이 손짓했다. 작은 찻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오늘 표정이 좋아 보이는구먼.”
민수가 웃었다.
“정산이 들어왔습니다. 이번 달은 열심히 뛰었더니 제법 쏠쏠해요.”
“고생했구먼.” 노인이 찻잔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몸은 어때?”
노인의 눈빛엔 뭔가를 아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민수는 잠깐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유튜브에 노래 올린 날이면 이상하게 더 피곤해요. 힘이 빠진다기보다… 체력이 아닌 다른 데서 뭔가가 가라앉는 느낌?”
노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부르면, 듣는 사람 마음이 네 안으로 스며드는 거야. 단순한 공감보다 조금 더 깊지. 네 목소리 안에 자리가 생겨서 그 자리에 잠깐 머무는 것. 좋은 일이지만, 자국이 남는다.”
“그래서 끝나고 나면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눌리는 느낌이 있었군요.”
“그럴 수 있지. 컵에 물을 담았다가 따라내면 컵 벽이 젖는 것처럼.”
민수는 그 비유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덜 지칠까요?”
“두 가지만 기억해.” 노인이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첫째, 남을 위한 노래만 부르지 말고 너를 위한 노래도 자주 불러. 그게 컵을 말리는 시간이지. 둘째, 경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듣고, 부를 때는 숨을 길게 써. 템포를 낮추고, 쉼을 길게 두면, 바람이 부는 방향이 달라진다.”
민수는 “박자·템포·쉼”처럼 몸으로 이해되는 단어들이 마음에 와닿는 걸 느꼈다.
“노래는 바람 같아서 다 막을 수는 없지만, 방향은 바꿀 수 있다… 그 말이 가슴에 박히네요.”
노인이 미소했다.
“그래. 오늘 밤은 남을 위해 부르지 말고, 지친 너를 위해 하나 불러.”
서점을 나서며 민수는 허리띠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묵직했지만 견딜 만했다. 차문을 닫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방향을 바꾼다는 말이 오늘은 유난히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이 자정을 막 지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자 스탠드 불빛이 마이크 그릴을 얌전히 감쌌다. 녹음 프로그램을 켜고 파일명을 썼다.
나에게 쓰는 편지 – 오늘
첫소리는 낮게 시작했다. 대학 시절 전 여자친구와 자주 불렀던 듀엣이 문득 떠올랐다. 오늘은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을 노래. 오직 나에게 맞춘 박자. 템포를 낮추고, 쉼을 길게 두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종일 쌓였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굳은살이 올라온 손바닥의 따끔거림도, 뜨거운 복도의 열기도 조금씩 멀어졌다. 비워냈다기보다, 숨을 놓을 자리가 생겼다는 느낌이 가까웠다.
녹음을 멈추고 파일을 저장했다. 업로드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럴 밤이 아니었다. 창문을 반쯤 열자 실외기 소리가 규칙적으로 돌아갔다. 그 일정한 소리에 호흡을 맞추니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민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다시 켰다. 잔액 4,006,200원. 이번 달은 잘 버텼다. 숫자 하나가 주는 안도감이 생각보다 컸다. 눈을 감으면서 그는 노인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너를 위한 노래. 경계. 템포와 쉼.
잠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