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낮과 밤, 두 얼굴
아침부터 공기가 눅눅했다. 민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터미널로 들어섰다. 좁은 공간 안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자동 컨베이어 벨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박스들은 구역별 바코드를 인식한 뒤 기사들의 자리 앞으로 ‘쿵쿵’ 떨어져 나왔다.
민수는 자기 구역 앞으로 밀려 내려오는 박스들을 옆으로 옮겨 차곡차곡 쌓으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 맞은편에 서 있던 박 기사와 최 기사가 투덜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박 기사가 곁눈질하며 툭 내뱉었다.
“민수 넌 좋겠다. 요즘 물량 꽉 찬다며? 우리 구역은 반 토막인데, 이래선 뭐가 남겠냐.”
최 기사가 옆에서 박스를 가지런히 쌓으며 맞장구쳤다.
“맞아. 난 앱 켜면 지도에 점이 듬성듬성인데, 네 지도는 꽉 차 있더라. 몸은 힘들겠지만 벌이는 제일 낫겠다.”
박 기사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사람 팔자도 가지가지지. 우리는 기름값도 빠듯한데, 저 친구는 할부도 금방 갚겠다.”
민수는 자기 앞에 쌓인 박스를 옮기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많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끝이 안 보여 죽을 맛이에요.”
그때 영호가 자기 구역 박스를 정리하다가 다가와 물 한 병을 내밀었다.
“야, 그 말이 사치다. 난 요즘 물량이 줄어 한숨만 나온다니까. 넌 그래도 쉴 틈 없잖아.”
민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서로 사정이 다른 거지.”
영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씩 웃었다.
“사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다.”
민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네가? 언제부터야?”
“한 달쯤 됐지. 배송하다가 알게 됐어. 그냥 택배 건네주며 몇 마디 했는데,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마주친 거야. 그 뒤로 연락이 이어졌고.”
민수는 놀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네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줄이야. 축하한다.”
영호는 멋쩍게 웃었다.
“어제 같이 밥 먹었는데, 얘기가 택배차로 흘러가더라. 내가 할부 남아 있다고 했더니, 고생 많겠다고 하면서도 웃어주더라.”
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남았는데?”
영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절반은 더 남았지. 그래도 뭐, 같이 웃어주니까 버틸 만하더라.”
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 나눌 사람이 생겼으면 이미 다 갚은 거나 마찬가지지. 부럽다, 새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민수는 잠시 어린 시절의 영호를 떠올렸다.
영호는 언제나 인기 많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자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귀 기울여 듣고, 특유의 재치 있는 말솜씨로 분위기를 풀어내던 녀석이었다. 둘 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영호는 붙임성이 좋아 사람들 속에서 더 빛났다. 민수는 묵묵히 옆에 서 있는 쪽이었고, 영호는 무대 위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한 반이었고,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다녔다.
심지어 지금은 직업까지도 같았다.
그런 소중한 친구가, 이제야 다시 누군가와 웃으며 연애를 시작한다니.
민수는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심으로 기뻤다.
그리고 잠시 쓸쓸한 위안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치, 그래도 얼굴은 내가 더 낫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영호가 어깨를 툭 치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너도 좀 만나라, 인마.”
민수는 웃음으로 대답했지만, 무거운 하루가 다시 어깨에 내려앉는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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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무렵, 햇볕은 지붕 위에서 바위를 굴리듯 내리꽂혔다. 골목 끝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유모차 안 아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울부짖고 있었고, 엄마는 땀에 젖어 허둥대고 있었다.
민수는 박스를 들고 지나가다가 무심코 짧은 허밍을 흘렸다.
노래라기보다 습관처럼 튀어나온 낮은 흥얼거림이었다.
그러자, 울음이 뚝 멎었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이가 오히려 방긋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골목이 낯설 만큼 조용해졌다.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울더니, 이게 뭐야.”
민수는 그저 무심히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애들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지.”
그 정도로만 생각하며 다음 주소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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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집은 작은 개가 지키는 단독주택이었다.
민수는 대문 앞에 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개가 짖는 건 아니겠지.”
그는 택배 상자를 들고 무심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발걸음이 자연스레 가벼워졌다.
대문 안쪽에서 개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이날은 짖지 않았다. 오히려 귀만 바짝 세운 채 민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뒷걸음질쳤다.
주인이 문을 열며 택배를 받아들었다.
“아이고, 오늘은 얌전하네. 고생 많으십니다.”
민수는 짧게 목례만 하고 돌아섰다.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배송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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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고시원 복도. 형광등은 깜박였고, 문 앞 분실을 두고 두 사람이 고성이 오갔다.
“내가 분명 여기 뒀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없어졌냐고요!”
민수는 박스를 들고 멈춰섰다. 괜히 끼어들어도 해결될 일 같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콧노래를 흘렸다. 음의 궤적이 좁은 복도를 따라 번졌다.
잠시 후, 싸움은 머쓱하게 식었다.
“내가 착각했나 보네.”
“나도 더운 날이라 예민했네요.”
민수는 박스를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복도를 빠져나왔다.
“더우면 다 예민해지는 거지.”
그는 그렇게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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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터미널로 돌아오자, 기사들은 선풍기 앞에 모여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 기사가 입을 열었다.
“야, 요즘 ‘가면의 목소리’ 들어봤냐? 그거 들으면 괜히 마음이 차분해져. 신기하더라.”
최 기사가 맞장구쳤다.
“맞아요. 그냥 노래가 아니라 묘하게 안정되는 게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찾는 거죠.”
영호가 민수를 흘끗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은근 니 목소리 같단 말야. 계속 들어도 니 목소리 같은데… 아닌가?”
민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말도 안 돼. 내 구역만 돌기도 벅찬데, 무슨 노래야.”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민수도 억지로 웃으며 대화를 끊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작은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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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민수는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발바닥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어깨끈 자국이 붉게 패여 있었다. 샤워 후 책상 앞에 앉자, 마이크가 어둠 속에서 은은히 반짝였다.
민수는 손끝으로 마이크를 쓰다듬으며 낮의 일들을 떠올렸다. 아이, 개, 다투던 사람들. 이상하게도 모두 조용히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냥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늘도 불러야지.”
민수는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발라드를 불렀다. 고음으로 치솟지 않고, 음과 음 사이의 쉼표에 하루의 무게를 담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방은 숨을 쉬는 듯 고요해졌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지 않고, 파일명만 날짜로 저장했다. 오늘은 퍼뜨리지 않기로 했다.
한참 동안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민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네… 뭔가 듣고 싶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유튜브에 접속했다. 습관처럼 ‘보이는 라디오’ 채널을 열었다. 힘들거나 지친 날이면 늘 그 방송을 보며 위안을 삼곤 했다. 진행자들의 가벼운 농담과 청취자 사연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니까.
마침 오후에 업로드된 새 영상이 떠 있었다. 민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진행자가 미소를 지으며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들어온 사연입니다. 낮에 아이랑 산책하다가 많이 울어서 곤란했는데,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자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방긋 웃더라고요. 참 신기한 하루였습니다.”
민수는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별일도 다 있네.”
영상은 곧 다른 사연과 음악으로 이어졌다.
민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익명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하루에 쉼표를 남긴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