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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l o a n Mar 13. 2022

전하지 못한 꽃


씩씩하고 잘 뛰어다니는 어린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아토피가 심해서 양쪽 antecubital 은 항상 발갛게 달아오르고 피부가 벗겨지고 진물이 나고. 긁지 말아야 하는 데 밤새 꿈속에서도 간지러움을 이길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벅벅 긁어서 엄마랑 동생이 잘 때마다 내 팔을 잡아주곤 했었다.

편도선염도 자주 앓았는 데, 목이 부어서 물도 못 삼키고 열이 올라서 붉은 얼굴로 시름시름 앓으면 엄마 손을 붙잡고 근처 소아과에 가서 곱게 빻은 ‘마이신’을 처방 받아 먹고 엄마가 이마를 쓰다듬어 주면 그 때서야 곤히 잠에 빠지곤 했었다.


어제는 엄마 생일이었다. 다음주가 아빠 기일 1주기라서 주말에 성묘가기로 했었는 데 달력을 보니 엄마 생일이 토요일. 정말 신기한 커플이다. 아빠 기일이지만 엄마 생일 선물로 이쁜 꽃을 가져다 주고 싶었다. 동생이 엄마는 딴 꽃 싫어하고 묘에는 국화가 제일 좋다고 했다며 멀리서 국화 사 오겠다고 하길래 꽃은 내가 하고 싶은 걸로 하겠다니 꽃다발 여러개를 차도 없이 어떻게 들고 오려고 하냐고 묻길래 들고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막상 꽃시장에 노랑 하양 꽃이 없으면 어쩌나, 너무 터무니 없이 비싸면 어쩌나 혼자 속앓이를 했지만.


목요일 오후, 꽃시장 마감 십분전에 가까스로 도착했더니 생각보다 꽃이 많았다. 지난 주와 다르게 꽃의 종류도 다채로웠다. 리시안셔스도 종류도 색도 많아지고 소국 퐁퐁 등 볼륨감있는 흰꽃들이 많이 보이길래 안도감이.

 유독 눈에 들어온 건 튤립이었다. 지난 주엔 이렇게 많지 않았는 데...게다가 흰색 튤립은 처음 보는 거 같은 데 너무 싱싱하고 탄탄해 보이길래 이걸로 해야겠다 싶어서, (올리브 키터리지도 잠깐 떠오르고) 가격을 물었더니 아주 비싸지 않았다. 비싸면 엄마가 싫어하는 데, 가격도 좋아서 잘 됐다 싶어서 흰튤립 4단, 노랑튤립 3단, 흰 스토크 1단, 레몬빛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 1단을 사서 이걸 나눠서 다발 3개 만들어서 성묘 가면 되겠다 하고 정말 신나서 집에 왔다. 집에와서 꽃들을 정리하는 데, 꽃 하나하나가 정말 싱싱하고 탐스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내 몫으로 사온 율듀스 장미, 파블로, 옥스포드, 하노이 라넌큘러스, 양귀비도 다 이뻤고. (많이도 샀다)


금요일 출근해서 목이 살살 아프더니 몸이 부르르 떨린다. 설마하면서 버텼고 퇴근해서 집에 왔는 데, 몸이 천근만근. 목이 갈수록 너무 아파졌고 결국 토요일 성묘는 갈수가 없었다.


아빠 기일이지만, 옆에 있는 엄마 생일 선물을 이쁘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에 신났었는 데 드리지 못했다. 동생이 그럼 국화라도 사 갈까 하고 묻길래, 내가 여기 많이 사 뒀으니까 안 사가도 될 거 같아. 엄마 괜히 돈 많이 쓰는 거 싫어해 그랬더니 응, 맞겠다. 그럼 엄마 아빠 언니네로 가서 꽃 보면 되겠다고 한다. 엄마가 나 좀 다시 차분해지라고 또 이렇게 교훈을 주나봐 했더니 동생이 언니 너무 ‘귀해서’ 그렇다고 하는 데, ‘귀해서’ 란 단어를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면서 어릴 적 편도선염 앓느라 뜨거워진 이마를 쓰다듬고 쓰다듬던 엄마손이 느껴졌다.



하루 지나니 더 커진 꽃들. 진한 노란빛 양귀비가 너무 이쁘다. 꽃몽우리는 껍질(?) 같은 데, 쌓여 있어서 무슨 색인 지도 모르고, 좁은 껍질에 구겨져있던 넓은 꽃잎이 껍질을 깨고 나오면 한지 같은 구깃구깃한 주름을 지닌 채 하루하루 더 퍼지면서 커진다. 너무 매력적이라 막내한테 양귀비 사진을 보냈더니 옛날에 베란다에 양귀비 하나가 오롯이 오랫동안 있었대. 엄마가 이쁘다고 하나를 꽤 오랫동안 정성스레 키웠다고 그걸 기억하고 바로 얘기를 꺼내준다. 나만 기억력이 별로고 둘 다 기억력이 참 좋아.


작년에 아빠 가고 나서 삼우제때 엄마가 양재 꽃시장에 가서 수선화를 사다가 묘 앞에 심어야 한다고 우리를 다그쳤던 장면이 떠오른다. 갑작스런 장례에 상치르느라 정신도 없고 신체적으로도 너무 피곤해서 겨우겨우 일어났는 데, 엄마가 언 땅을 파서 수선화를 꼭 심어야한다고 이번에 꼭 심어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을 해서 성묘가는 길에 양재동에사 수선화를 한 박스를 사서 묘 앞까지 낑낑대로 들고 가서 아빠 근처에 심었는 데 뒤늦게 온 엄마가 이거 아니라고. 미니묘목(?)을 묘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께 몇개 드리고 집에 도로 가져와서 집에서 엄마랑 한참 보던 생각이 난다. 그때 계속 수선화 심어야 한다고 심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얘기하던 이유가 다시는 그렇게 얘기할 기회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랬던 걸까.


찾아보니까 수선화는 10월경에 심는 거란다. 올해 생일 선물도 전하지 못했으니 가을에 꼭 수선화 심어줘야지. 이렇게 써 놓으면 잊지 않겠지.


다음주엔 수선화를 사야겠다. 집에 두고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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