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닉네임 호칭, 부캐의 탄생
갑자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방금 한 질문에 답변을 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사실 딴 생각을 하다가 질문이 뭐였는지도 몰랐었다. 뭔가 들켰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고, 반 아이들이 일시에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긴장이 되어 심장 뛰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었다.
"OO씨", "OO대리님"
적으면 열 번, 많으면 스무 번.. 서른 번? 사내 메신저와 전화로 내 이름을 찾는 것까지 합치면 그 이상도 될 수도 있다. 회사에서 이름을 불리면 나도 모르게 중학생 시절의 어린 아이처럼 긴장이 됐다.
(이름 없음)인 척
이름을 불린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곳을 보던 나를 멈춰 세우고 같은 주파수로 맞추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하던 일과 머리 속에 펼쳐지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나를 부른 이를 향해 고개를 든다. 그 주파수를 통해 대개는 부탁이나 요청, 지시와 같은 말이 전파된다. 하여, 나는 이름을 불리는 게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었다. 특히 저녁 6시 반 즈음 내 이름이 불린다면 그것은 예감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다만 하나의 몸짓으로 사무실 한 켠에 있다가 평화로운 퇴근을 맞이했을 텐데...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는 일감이 꽂히었다.
종을 칠 때마다 밥을 주는 줄 알고 군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이름이 불릴 때마다 긴장도와 예민도가 상승하여 "네!"가 아니라 "..네?(왜 찾지?)"로 대답을 했는데, 그 습관화된 감각은 주말에도 여전했다. 경증 피해망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찾는 친구의 전화벨소리에도 스트레스지수가 +1되었다.
Another me, 부캐의 탄생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고 나서 가장 눈에 띈 변화는 호칭이었다. 여기서는 원래 이름 대신 영어 이름을 썼다. 예전에 스타트업에서 영어이름이나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뉴스에서 접했을 때는 약간 닭살돋는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영어 회화 학원에서 각자 이름을 정해서 불렀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막상 그 당사자가 되어 스스로 지은 영어이름으로 통성명을 하고 나니 뭔가 새로운 자아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회사에서의 나와 실제의 나를 분리할 수 있는 구분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조인한 스타트업은 최근 채용이 많이 했고, 과거 퇴사자 이름을 쓸 수 없는 룰도 있어서 내가 후보로 생각했던 이름은 이미 선점당한 상태였다. 영어 학원에서 볼 만한 왠만한 이름은 거의 다 동이 난 탓에, 결국 나는 한국이름 느낌과도 아예 무관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름을 지었다. 이름을 제출할 당시에는 고민도 되고, 나중에 적응이 안되면 어떡하지하는 염려도 살짝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실제 이름과의 갭 덕분에 뭔가 부캐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내 이름 달고 하는 일이 아니니 책임을 덜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름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적 삶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업무 영역으로 가져오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 역의 상황 즉 업무의 스트레스도 퇴근 후의 나에게 짐을 지우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심리적 건강을 챙겨가면서 번아웃도 예방하면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 문화의 단점도 언젠가 발견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겪어본 영어 호칭 문화는 아직은 '호'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