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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gram Nov 09. 2023

어느 경기도민의 출근 길

도어투도어 편도 1시간 40분

인스타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 본 적이 있다. ‘내 적성이 뭐지?’라고 찾는 것보다 남들은 나만큼 이걸 안한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떠올리는게 적성을 찾는 빠른 방법이란 글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남들보다 월등하게 에너지를 쏟는 것은 딱히 없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건 편도 1시간 40분을 자랑하는 나의 출퇴근..? 회사 동료들과의 출퇴근 불행배틀에서 결코 쉽게 밀리지 않는 나.. 그러나 그것은 전혀 적성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김포에서 역삼까지

이직 후 나는 김포에서 역삼까지 1년 6개월째 출근 중이다. 김포 한강신도시 장기역에서 악명 높은 김포골드라인을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9호선 급행으로 환승한다. 신논현에서 하차 후에는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에 위치한 회사까지 파워워킹을 한다. 사무실 도착할때쯤 눈치 없는 애플워치는 내게 혹시 운동중이시냐는 알람을 매일 보낸다. (방금 느낀 것은 어쩌면 나는 매일 아침 운동 중이었던 걸수도 있다는 것..)

어디 살아요?

어디 사냐는 스몰톡은 가끔 경기도민(김포시민)을 도발하기도 한다.

- 김포? 9호선이요? (아니요 그곳은 서울 강서구예요)

- 골드라인? 거기 막 사람 실신한다던데.. (저도 컨디션 안 좋았을 때 두 번정도..)

- 서울로 이사 나와요 (저도 그러고 싶긴한데..얼마전 결혼을 한 유부라 또 혼자서 정할 수 있는게 아니고..)

- 재택해요! (갑자기 회사에서 재택근무 사라짐.. ㅠㅠ)


젊은 사람이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군요! 라고누군가 내게 말한다면 나는 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한 때 나에게도 한 때는 통근거리를 현명하게 쓸 101가지 옵션같은게 있었고, 그 중 10가지 정도는 실천도 해본 것 같다.


그러나 뭔가를 하기에는 사람이 이제 정말 너무 많아졌다. 작년 이맘때까지만해도 앉아갈 확률이 50%쯤 되던 김포 장기역은 이제 앉을 확률이 0%에 수렴하게 되었고, 김포공항은 새롭게 서해선이 오픈되며 이제 서울 최초로 5개의 노선이 얽혀있는 환승역이 되어버렸다.


책을 읽는 것, 오디오북을 듣는 것, 영어 단어라도 외우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것보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손잡이를 잘 사수하는 것.. 그리고 가운데 통로가 아니라 최대한 좌석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게 출퇴근의 유일한 미션이 되었다. 그래야 그나마 다음 역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파로부터 횡경막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집과 회사 사이의 웜홀(그러나 겁나 느린), 오픈런 그 이상의 자리 쟁탈전, 허리를 곧게펴고 서 있을만큼의 공간을 사수하기 위해 거친 풍랑 속 나무처럼 두 발에 힘을 주고 서 있어야하는 일, 그것이 나의 출근길이다. 그런 출근 길을 잘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급행 대신 완행을 타고 가는 것이다.


신논현행 완행열차

김포공항에서 신논현까지 9호선 급행을 타면 33분이다. 급행 대신 완행을 탄다면 54분. 약 20분 정도가 더 소요되나 앉아서 갈 확률도 높아지고, 사람 간 거리가 확보되어 좀 더 쾌적하게 올 수 있다. 나는 이제부터 20분 일찍일어나서 완행을 타고 출근을 해볼까 한다. 여유롭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또 퇴근 때는 미루고 미루던 브런치글을 작성하며 시간을 더 잘 써보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출퇴근은 적성이 아닐지어도, 그것을 뒷받침할 체력이 안 될지어도 시간을 쪼개쓰는 것.. 내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나의 적성이 될 순 있을 것 같다. 이제 골병 지옥철 통근러가 아닌 출퇴근 트래블러가 되어보자는 야심찬 기획.. 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문득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어쩌면 나.. 장거리 통근에 미쳐버린 직장인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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