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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Oct 08. 2020

천천히 가는 여름

여전히 난 여름에 남아, 서서히 느낀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삶의 붕 뜬 기분, 불안일까 설렘일까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순간은 날카로운 시간에 베여 흩어진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는 나를 현재에 잡아두는 건 기록 일지도 모른다. 즐거운 시간을 한바탕 보내고 나면 곱씹곤 하는 내가 과거에 혼자 남아 있다. 사람은 모두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그 모습들의 차이가 큰 편이라고 느낀다. 그 괴리감 속에서 저울질하면서 언젠가는 어떤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일까 고민에 빠지기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간극을 즐기기로 한다.



적어도 메트르놈 같은 박자를 타지 않는 건 확실하다. 마치 파도 같다. 삶의 환희에 가득 차서 밀려 들어오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내면이 텅 비며 빠져나간다. 다소 빠른 템포로 느린 템포들 사이를 밀고 당기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유쾌하게 장난치는 웃는 얼굴과 혼자 있는 시간의 정적이고 사색적인 기록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무엇이 그렇게 바뀌게 했는지 의아해한다. 혼자 있을 때의 시간을 보내는 나도 좋고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나도 참 좋다.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즐거웠던 시간을 기록하고 음악을 곱씹으면서 붕 뜬 나를 빼곡히 채워준다. 아마 그전에 허기지다고 느끼는 건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허한 걸 거야. 하고 싶었던 말들로 온점을 채우고 나면 비로소 채워진다.



할 수 있다는 긍정으로 삶을 영위해 가다가도 과거의 발자국을 돌아보면 아직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무능함을 피부로 느낀다. 시간이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지 내가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지 가끔 헷갈리기도 하나, 사실 초조함을 느끼는 건 스스로 만든 환상일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는 불변의 진실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기에 현재를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계속 자각하며 살아야 하겠지.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인가, 삶이 무엇일까 하는 공상에 빠질 때면 지나간 과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다. 이미 알고 있는 시간의 기억은 돌아갈 수 없음에 슬픔을 느끼지만 빛이 바랜 색감처럼 포근하고 안락하다.



여름이 느껴지는 노래,  풍경, 색감, 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을 지나고 있지만 난 여전히 여름 속에 살고 있다. 글을 적으면서도 지나가버리는 여름의 노래 가사들이 탁월하게 좋아서 끝나가는 노래를 붙잡고 다시 또다시 처음으로 향하고 만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만끽하기 위해 되감는다. 이런 과정을 반복 재생한다면 밑그림 같은 한 번뿐인 장면이 겹겹이 쌓여 진해질까? 이런저런 감정의 결들을 진하게 느끼다 보니 한때는 무감각을 바란 적도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 감정의 굴곡들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간극에 괴리감을 느낀다는 나의 말에 어떤 누군가가 삶의 반경이 넓은 것 같다며 답해준 적이 있는데 여운이 남는 말로 마음속에 자리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따뜻한 말이었다. 따스한 말들은 마음에 늘 담아두고 싶다. 그 자체로 편안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많은 말들이 쌓였었구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같은 생각들을 하나 둘 모아보니 역시 그냥 시간만 흘려보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흩어져 있던 기록의 흔적들은 발자국과 같다고 느낀다. 기록 덕분에 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걸 느낄 때마다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아 졌다. 그 나로 충만한 기분이 참 좋다.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닐까. 충만한 느낌이 들 때 온점을 찍고 싶어서인지 늘 글을 써두고 마무리짓는 걸 차일피일 미뤄 버린다. 말끝을 흐리듯 내일, 내일 마무리하자 하고 잠자리에 누워 버린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가 나를 괴롭히는 걸까. 최근에는 가위에 자주 눌렸다. 익숙한 듯 벌떡 일어나서 다시 잠드는 밤들을 반복하고 있지만 오늘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버퍼링 걸린 로봇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들을 계속해서 되뇌었던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당장 하고 있는 일들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 한 달이 지나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나 보다. 그래서 오늘은 당장 해야 할 한 가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니까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떠올려서 고장 난 것처럼 느꼈구나 하고 깨달았다. 마음 한편에 무거운 짐이었던 한 가지 과업을 마무리해서인지 조급한 느낌보다 그래도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이 나를 채워주었다. 멈춰있다는 나의 착각은 환상에 불과했다. 또다시 내 생각에 갇히거나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겠지. 그럴 땐 내일의 내가 오늘의 기록들을 떠올렸음 한다. 머릿속에 오래 묵었던 일을 끝내면 지칠 줄 알았는데 다음의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살아났다. 긍정적인 감정으로 한 달의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불평이 많던 나에게 엄마가 늘 해준 말이 있는데 세상에 감사할 것 천지라고 말했다. 어릴 땐 잔소리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요즘은 마음에 와 닿는다. 며칠 전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본가로 내려가서 꽃도 선물하고, 엄마에게 한 권으로 된 질문 형식의 편지를 썼다. 엄마와 관련된 질문이 작성된 책에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인데 만약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엄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감사할 것 천지라는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죽음을 상상해보는 것은 시간의 가치의 감각을 깨워주는 장치다. 가장 슬퍼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니, 아쉬움이 남았던 지나간 시간들이 후회되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며 똑바로 말하고 싶었다. 후회 없는 시간들로, 사랑으로 가득 채운 순간들을 곱씹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음을 감각하고 갔음에 감사했다고, 세상에 감사할 것 천지라던 엄마 말이 맞았다고 말이다. 감사를 몸과 마음에 새겼던 오늘처럼 내일의 나도 분노와 슬픔으로부터 섣불리 배움을 얻지 않기를 바란다는 문장을 마음에 담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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