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30.
한동안 부산스러웠다. 엘리베이터가 작은 탓에 큰맘 먹고 구입한 가구를 돌려보내고, 사다리차를 섭외해 다시 부르고 창문을 떼었다 붙이고, 벽에 튼튼히 박혀 있던 책장을 분해하고, 당연히 빼곡하던 책을 모조리 꺼냈다가(꺼낸 김에 중고책도 많이 솎아내 팔고) 다른 방에 원복하고, 나와 수민 둘만의 피씨방이 되어줬던 커다란 원목 테이블도 옮기고(그 작업을 위해 방문도 두 개나 떼어내고), 턱걸이 기구도 질질 끌고 베란다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청소기 위치도 여러 차례 조정하고, 미루고 미루었던 창고 정리까지. 그리하야 가까스로 로마방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
책장과 책상을 걷어낸 로마방이 예상보다 더 넓어 보여서 다행이고, 이제는 여기 매트를 깔아야 할지 암막 커튼을 달아야 할지 등의 또다른 고민이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이걸 대체 언제 다 하나 싶던 작업을 끝내놓고 보니 속이 너무나도 시원하다. 로마를 맞이할 준비가 차근차근 마무리되고, 동시에 로마가 우리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듯한 느낌,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무언가 새롭게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들이 피어나는 봄과 맞물려 더더욱 이 ‘시작’의 기운이 짙게 드리우는 것도 같다. 수민의 뱃속에 로마가 있고, 이 녀석이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고, 이미 그러하지만 그가 세상 빛을 보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예감이 점점 체감으로 바뀌고 있달까.
그래서 요샌 밤마다, 주말마다 둘이 나들이를 떠난다. 영화도 보러 가고 꽃도 보러 나선다. 이제 제법 만삭이라 긴 산책은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 볼 수 있는 가장 어여쁜 것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태교를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둘이 마음 편히 놀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길을 나선다.
어젯밤엔 남산 벚꽃길에 드라이브를 갔는데, 생각보다 어둡고 아직 벚꽃도 만개하지 않아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주차를 하는데, 차를 댄 바로 옆에 커다란 나무가 활짝 핀 벚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 우린 여기를 두고 어딜 다녀온 걸까, 하며 웃기도 했다. 허탈함의 웃음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재미있었으니까.
지난 겨울 김금희 작가의 연작소설집 『크리스마스 타일』을 읽다 정말 아름다운 대목을 마주했다. 언젠가 로마에게도 꼭 일러주고 싶어 스크랩까지 해 둔 <월계동(月溪洞) 옥주>의 일부다.
“저기 봐, 백로가 난다!”
야콥이 모래밭을 가리키며 왜 그렇게 환호했는지, 레이철이 왜 자신에게 눈짓을 하며 크게 웃었는지 옥주는 잘 알고 있었다. 달려나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스물네살의 야콥과 그 다가섬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물셋의 예후이. 비슷한 이유로 포기라는 걸 고려하지 않는 동갑의 윤슬까지.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샹강의 수천그루 귤나무가 해를 거듭해 자라고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며 바람이 새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처럼. 돌아오는 버스에서 예후이와 야콥은 나란히 앞뒤로 앉았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야콥이 앞좌석 손잡이에 턱을 바짝 기댔고 예후이는 이따금 몸을 돌리는 대신 이마를 뒤로 완전히 젖힌 채 얘기했다. 자연스레 둘의 얼굴이 매우 가까워졌다. 열어놓은 버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둘은 정말 여름 여행에 어울리는 환한 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도 반짝이는 야콥과 예후이처럼, 먼 길을 돌아 원점에 와서야 발견한 벚꽃나무 아래서 웃는 우리처럼, 로마도 자신만의 모습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다가올 그날을 위해 우리는 로마의 방을 잘 가꾸어 놓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