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살면서 폭력을 가장한 단 한 번의 사랑 외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가져본 적은 없었다. 현모양처를 꿈꿨지만 나는 현모양처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다.
진지한 관계란?
일전에 결혼정보회사(이하, 결정사)를 통해 남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의 일화를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결정사를 통해 세 명 정도와 몇 번의 만남을 지속했으며 그중 단 한 명과 조금 긴 연애를 했다. 길었다고 해봤자 10개월쯤?
결정사에서 만나 10개월이면 꽤 긴 연애에 속한다.
암튼 이 남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나는 너에게 반했다"라는 분위기를 온 얼굴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걸 공개하게 된다.
그는 "나의 집은 OO에 자가이며, 주식 계좌에 얼마 있고 형제들이 하는 일은 OO이며, 부모님의 노후는 매월 얼마씩 연금으로 보장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진 그의 질문에 "너는 어떤 상태이며, 부모님이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실 수 있느냐"였다.
나는 당황했다. 고작 한 달 만에 받은 질문이었고 사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질문이었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게 나의 살림살이 공개는 그렇게 달가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것도 나는 아직 결혼할지 말지조차 생각을 안 해본 상황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결정사를 통해 만난다는 것부터가 이미 모든 걸 공개하고 시작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빨리 결혼하고자 했기에 결정사에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결혼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준비가 안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자산 현황을 공개하고 내게도 투명하기를 원했을 때 나는 처음 경험해 봤다. 진짜 결혼을 한다면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40살이 넘어서야 이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을 공개하고 서로 허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어쨌든 나 또한 그에게 나의 자산 현황이나 우리 부모님 노후 상황에 대해 공개를 하긴 했었다. 그와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지만 서로 공개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집이 있었지만, 그 집은 나의 직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는 100% 재택근무를 하기에 집의 위치가 문제 되지 않았지만 난 달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을 세놓고 다른 집을 찾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가진 돈을 빨리 공개하고 대책을 세우자는 생각이었다.
뭐, 나는 그렇게까지 그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이후 정말 집을 어디에 구하느냐의 문제로 불편해지게 되면서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집 위치를 고민하기 전에 그와의 결혼 자체를 고민했어야 했다. 결국 이렇게 몇 번의 불편함이 이어지다 우리는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문제였을 것이다.
결혼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심지어 부모님의 노후에 얼마나 필요할지까지 서로 고민해야 하는 게 결혼이라는 거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이만 먹은 한심한 아이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