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없는 집에 온 창문형 에어컨의 행방
사상 최악의 폭염이 덮쳤던 2018년 만큼은 아니겠지만 2021년에도 무시무시한 폭염이 여름에 찾아올 거라고 했다. 하루 중 가장 높은 때의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 같으면 폭염주의보, 35도 이상이면 폭염경보가 발표된다. 주의보인지 경보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지간하면 뜨거울 때 외출하지 말고, 그늘 찾아다니고, 물 많이 마시라는 아파트 방송을 여러 번 들었고, 휴대전화 재난 알림 문자도 많이 왔다.
내가 창문형 에어컨을 산 건 2019년 여름이 막 시작될 시기였다. 더워도 더워도 이렇게 더울 수 없었던 지난 해 여름을 겨우 겨우 지나 올해는 죽지 않기 위해서는 에어컨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사 갈 때 떼 가면 되긴 하지만 세입자에겐 에어컨 가격이나 설치 비용이 제법 부담되었고, 뭔가 거추장스럽게 집에 붙박이 가전이 들어오는 게 싫어서 창문형 에어컨을 샀다. 실외기가 필요 없으니 별도로 설치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창문에 그냥 올리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우리집에 창문이 없다는 사실이지만……. 그게 뭐 큰 문제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창문이 없으면 문으로!
전자레인지처럼 생긴 에어컨이 배달되어 왔다. 무겁다. 그래도 혼자 들 수는 있다. 우리집에 창문형 에어컨을 놓을 수 있는 문은 두 개다. 큰방 앞 베란다로 나가는 문과 작은방 뒷 베란다로 나가는 문. 복도형 아파트 끝집이라 작은방에도 베란다가 있다. 에어컨이 커버하는 공간이 크지 않으니 작은방에 설치해보기로 했다. 베란다에 우리 고양이 화장실이 있어서 먼저 모래 박스를 큰 베란다로 옮기고 창문형 에어컨을 문에 놓고 윗부분은 커튼으로 가렸다. 위애애애애애앵~ 예상보다 소음이 크다. 혹시라도 냉기가 새어나갈까 방문을 꼭 닫고 방이 시원해지기를 기다렸다. 시원해지지 않았다. 고양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할지 모르기 때문에 내내 방문을 닫아놓을 수도 없었다. 커텐으로는 커버가 되지 않는군. 일단 오늘은 후퇴다.
다음날 급한대로 회사에서 행사 때 나가서 전시용으로 썼던 우드락 판을 구해와 윗부분을 막아보았다. 오오오오, 제법 시원해. 그런데 좁은 방에서 굉음을 들으며 에어컨이 시원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너무 무섭다. 고양이 화장실도 문제다. 앞 베란다에도 마땅히 놓을 자리가 없어서(화단으로 쓰라고 공간 구획이 괴상하게 되어 있음) 세탁기 바로 앞에 두거나 방에 들여놔야 하는데, 고양이도 나도 행복하지 않은 결정이다. 어쩔 수 없다. 고양이 화장실을 원위치로.
그렇다면 창문형 에어컨이 놓일 장소는 큰방 베란다로 나가는 문이다. 커버해야할 공간이 더 넓어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 큰방으로 옮겨서 틀어보자. 설치는 아니지만 설치에 버금가는 ‘작업’이 이어진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무거운 에어컨을 이리저리 들고 다니는 건 내 몫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이튿날 바로 해보지도 못했다. 여름날이 지나간다. 더위는 일단 참아보자. 그래도 우리집에 에어컨이 있잖아.
드디어 결전의 날. 큰 방 베란다에 에어컨을 놓고 윗부분을 우드락으로 막았다. 창문틀에는 창문이 드나드는 길(?)이 여러 개 있어서 창문형 에어컨을 턱 하고 놓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무거운 게 불안하게 그냥 얹혀있는 거다. 집에 돌아다니는 나무판을 창문틀에 얹고(왜 집에 그런 게 있지?), 크기가 에어컨과 딱 맞지 않으니까 또 어정쩡하게 옆의 여백을 메꾸면서(맞춤으로 제작한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던 거니까), 어찌어찌 임시로 에어컨 설치를 마쳤다. 우와와왓! (시끄럽지만) 시원해. 감격스럽다. 큰 방이 시끄러우니까 그나마 폐소공포도 덜하다. (거의 끝나가는) 여름을 그렇게 나고, 가을이 되자 에어컨을 보자기에 잘 싸서 베란다에 두었다.
다음해, 에어컨과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이다. 더워지면 에어컨의 보자기를 풀어야지 풀어야지 다짐만 하다가 8월이 되었다. 작년에 임시로 사용하던 우드락은 회사에 반납했으니 올해는 우드락도 사야한다.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8월이 되었다. 그래도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우드락을 샀다. 에어컨을 설치할 마음을 먹었으나, 그 난리를 또 칠 생각을 하니 너무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여름이 다 가버렸다. 에어컨이 집에 있는데 틀지 않는 사람이 됐다. 뭐, 안 틀면 좋은 거니까.
그리고 올해. 작년보다는 더운 것 같다. 작년에 사놓은 우드락도 고이 모셔져 있다. 이제 정말 설치만 바로 하면 된다. 에어컨은 2019년 가을부터 2020년 여름을 지나 2021에 여름까지 베란다에서 본인이 설치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라?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너무 덥지는 않다. 물론 나는 가장 더운 시간에는 에어컨이 빵빵한 작업실에 있다. 집에 혼자 있는 고양이만 걱정이지. 여름이 되자 그렇지 않아도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잠만 자는데 이제 정말 움직이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위해 에어컨을 틀어놓고 나올 수도 없다. 맞바람이 들도록 7월과 8월 내내 창문을 늘 열어놓고 산다. 우리 고양이 여름 잘 나고 있지? 시원한 데서 잘 쉬고 있지? 대자리 방석이랑 대리석 방석도 놔줬잖아. 가만히 있으면 덜 더울 거야.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다보니 밤에서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올 때 기온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는데, 대서 즈음에는 24시간 중 한 순간도 덥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래도 그전에는 새벽에는 좀 덜 더웠는데 중복과 입추 사이 일주일 정도는 새벽 5시에도 땀이 났다. 어머, 이제 정말 에어컨을 설치해야겠네. 딱 일주일이라도 시원하게 지내야겠다. 집에 손님도 온다고 하니까 드디어 에어컨 설치를 하자.
그런데! 손님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입추가 지나가 다시 날은 선선해졌다. 여전히 앞뒤 창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새벽엔 살짝 춥기까지 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여름을 났다. 이쯤되면 이 에어컨을 중고로 팔아야 하나 싶다.
덤+ 하나)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났던 2016년의 여름 이야기
당시에 내가 살던 집은 8층짜리 복도식 아파트의 꼭대기층이어서 더워도 너무 더웠다. (당연히 겨울에도 너무 추워서 보일러를 틀어도 우풍이 너무 거셌다. 방한텐트에 열풍기에 손난로를 총동원에서 겨우겨우 겨울을 났다) 맨끝집이 아니라 지금처럼 맞바람 통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도 없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고 얼음을 선풍기 앞에 달고 물수건을 몸에 붙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던 어느 날, 밤에 자다가 너무 더워서 급기야 깔고 있던 1인용 대자리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세탁기 쪽에 머리를 뒀던가 발을 뒀던가 어쨌든 바람이 들어오는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누워야 그나마 시원할 것 같았다. (중국집에서 주방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음식이 나오는 시간을 단축시키라는 이영자 님의 말과 원리는 같다) 어라? 정말 더 시원한데? 기왕이면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젖혀버릴까? 불을 다 꺼서 모기가 들어올리도 없다. 어릴 때 집에서 더우면 불을 다 끄고 벌레를 피해 문을 열어두었던 생각이 났다. 흑, 정말 시원하잖아. 그때부터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나는 베란다에서, 방충망까지 모두 활짝 열어젖힌 후, 대자리 위에서 겨우 잠들었다.
덤+ 둘)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났던 2018년의 여름 이야기
정말 더웠다. 진짜 유래 없이 정말 더웠다고 한다. 이미 여름이 시작되어 버려서 에어컨을 주문해봤자 여름이 끝나고 올 것 같아서 내년엔 꼭 에어컨을 사고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겨우겨우 여름을 지났다. (새로 이사온 집의 베란다에서는 잘 수 없었다. 구조가 이상하다고 위에 말했죠? 전 집처럼 꼭대기 층이 아니라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도 없다) 그런데 여러분, 행복한 순간이 찰나인 것처럼 더운 순간도 흘러갑디다. 내년엔 꼭 에어컨을 사야지 사야지 다짐하면서 에어컨을 검색하면서 버티다보니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