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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Nov 14. 2023

때론 무난한 예술인

2023 예술인파견지원사업 - 예술로 (대전문화재단) 후기 01

5월부터 6개월 동안 ‘예술인파견지원사업 - 예술로’에 참여했다. 예술인복지재단에서 10년째 운영하는 사업인데, 몇 년 전부터 대전에서는 지역의 예술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대전문화재단이 참가예술인/기업(기관) 선정 및 관리를 담당한다. 


작년에 이사 온 뒤, 친구 서와 송은 자기 일처럼 내가 뭐 먹고 살지 걱정하며 가끔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5년 동안 예술로 사업에 참여했던 송이 예술인 친구도 사귀고 지역 예술계 분위기도 파악할 겸 해보라고 추천했다. 지원할 때는 누구와 어떤 일을 어디서 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라 불안했지만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에게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게 어디냐 싶어 지원했다. 


신청서 작성과 면접은 전혀 어렵거나 떨리지 않았다. 예술로 사업에 절대 참여하지 않는 서가 잔뜩 겁을 줘서 막상 된다고 해도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이 더 컸다. “언니, 갈등의 레어이가 너무 많은 사업이야. 예술인간의 갈등, 리더예술인과 참여예술인과의 갈등, 재단과의 갈등, 기업과의 갈등. 어휴, 나는 절대 못해. 아마 언니도...” 6개월 동안, 모르는 사람 다섯 명과 한 팀이 되어, 문화재단의 관리를 받으며, 기업에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일을, 예술적으로 실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별 과제를 함께 해야 하는 친구들은 모두 예민하고 까다로운 예술인이고, 문화재단의 직원들은 공무원처럼 보수적으로 일할 것이고, 참여하는 기업은 예술인이나 재단과 입장이 다르지만 그래도 권위적일 테지. 일단 신청했으니 결과 발표가 날 때까지는 혹시 떨어질까 긴장되었고, 선정된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참여를 권유한 송은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더 다행’이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는데 다행히 선정이 되었다.


예술인 30명과 6개의 기업 담당자들이 부족한 시간이나마 상호면접을 하고서 예술인은 원하는 기업을, 기업은 원하는 예술인을 순위별로 제출하면 재단에서 적절히 팀을 꾸려주는 방식이었다. 운 좋게도 우리 팀에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성격의 여성 예술인 5명이 모였다. 시각 예술가, 도예가, 댄서, 고수, 글 작가로 활동 분야가 다양했다. 예술가로서 다른 장르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이 있었고, 그 관심을 적절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회성도 있었다. 크게 다투거나 마음 상할 일이 없어서 우리 팀 분위기가 어떻게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이 잘 안되었을 때 원인을 찾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그럭저럭 잘 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흡사 잘 정돈된 집에 들어선 기분과 비슷하다. 어질어진 집에서는 식탁, 주방, 싱크대 등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깨끗한 집에서는 모든 곳이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좋은 거다. 어렵고 티 안 나는 기본. 팀워크도 그렇다. 다들 약속 시간 잘 지키고,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충분한 대화를 통해 사업 방향에 공감했다. 타인의 맡은 분야에 진심 어린 찬사와 감사를 표했다. 

처음 한두 달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아서 만나면 줄곧 같이 밥을 먹으며 자기가 하는 작업, 작년에 예술로 사업에서 경험한 일 등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너무들 쉽게 가족관계라든가 고민이라든가 속 깊은 이야기를 훅 털어놔서 당황했지만 그것 또한 그러려니 자연스럽게 두니 서로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얘기를 주로 하는 사람과 듣기만 하는 사람, 듣고 질문 사람, 요약 정리하는 사람, 얘기 끝나면 식당 추천하는 사람, 메뉴 선택에 주장이 강한 사람과 아무거나 상관없는 사람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자기 작업에서는 쉽게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강단 있는 예술인이지만 함께 팀을 이뤄 일을 할 때는 무난해질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글은 혼자 쓰므로 나만 잘하면 된다. 쓰는 동안 재밌고 괴로운데, 다른 사람 신경 쓸 일 없으니 홀가분해서 편하고 마음 나눌 이가 없어 가끔은 외롭다. 영화나 연극처럼 여럿이 함께 만드는 작품은 복닥거리는 인간관계까지 작업에 포함될 텐데 그 역동을 어찌 감당할까 싶다. 내가 모르는 기쁨과 뿌듯함이 있겠지만 아직은 혼자 창작하는 일도 버겁다. 우리 팀은 팀원이 나 하나뿐이라 ‘뼈를 깎는 고통’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뭔가를 써내고 났을 때는 기진맥진한 나를 내가 알아서 일으켜 세워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의뢰받은 글을 해치우듯 써버리고 나서 찾아오는 씁쓸한 기분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책을 만들 때는 기획자나 편집자와 함께 하지만 쓰는 동안은 혼자다. 게다가 우리가 한 팀이기는 해도 입장이 달라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지만 창작자로서는 여전히 공감 받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처럼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다보면 별 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며 응원하고 지지하게 되는데, 실은 내가 생각했던 별 것 아닌 일이 엄청 별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무심히 뻗은 손짓이, 한 듯 안 한듯한 터치가, 어려운 말 하나 없는 문장이, 나도 칠 것 같은 장단이 쉽게 나온 것 같지만 그 동안 당신이 노력한 결과라는 걸 같은 예술가로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표현한다. 예술가로서 원했던 것들을 다른 예술가에게 관객의 입장에서 돌려주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과거와 과정을 기꺼이 들여다본다. 직장 상사를 같이 흉보는 동기처럼 공감대를 형성하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존경하고 작품과 작업을 존중한다. 내가 뭔가를 써 가면 ‘역시 다르다, 나는 이렇게 못 쓴다, 잘 썼다, 고맙다’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독자나 편집자가 해주는 인사도 고맙지만 그들의 찬사에는 ‘쓰기 싫었지만 기어코 써낸 그 마음, 대충은 하기 싫어서 이리 저리 궁리했을 마음, 일단 끝내긴 하지만 여전히 아쉬울 마음, 그래도 막상 쓰면서는 또 어딘가에 다가가고 있다는 행복한 마음, 내놓고 나서는 세상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은 그런 모든 네 마음, 다 나도 알아’가 담겨 있다. ‘그렇지, 그런 마음으로 내가 글을 썼어. 역시 쓰는 게 좋아. 그래서 계속 쓰고 싶어. 잘 쓴다는 응원이 힘이 돼. 이 정도면 잘 쓰는 거 아닌가. 나는 역시 쓰는 사람으로 계속 살 거야. 힘들지만 즐거운 순간을 계속 맞이하겠어.’ 앞으로도 계속 혼자 쓰겠지만 이 순간들이 나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 것 같다. 


마지막 입금을 앞두고 결과보고서니 자료집 원고니 하기 싫은 일감이 밀려 있지만 무난했던 우리 팀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언니, 운이 진짜 좋은 거야. 팀원들 다 좋지, 기업도 괜찮았지. 이런 일은 정말 흔치 않아.” 이렇게 말하는 서는 앞으로도 예술로 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6개월의 활동비가 아쉬워서 내년에도 아마 지원을 할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굴 만날지 두렵지만 올해처럼 운이 좋을지 또 모른다. 여전히 되면 다행 안 되면 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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