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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Nov 15. 2023

가치봄 영화를 예술가들과 같이 봄

2023 예술인파견지원사업 - 예술로 (대전문화재단) 후기 02

2023 대전문화재단 예술로 사업에는 6개의 기업/기관이 참여했다. 예술인과 기업이 각기 희망 순위를 적어내면 문화재단에서 이를 반영하여 팀을 꾸렸다. 예술인과 기업 양쪽 다 1순위로 적어냈는데도 연결되지 않았거나, 최후 순위로 적어낸 기업으로 배정된 예술인들이 대부분인 팀도 있었는지 팀 구성부터 불만이 나왔다. 나는 2순위로 적어낸 메가박스로 가게 되었는데,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1순위로 적어낸 곳에 배정되지 않은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활동기간 6개월은 너무 길고 어느 팀에 속하고 싶은지 판단하고 마음을 정해야하는 며칠은 너무 짧다. 고민 끝에 기업이 사업을 대하는 태도나 기업과 사전에 매칭된 리더예술인의 성향을 짐작해서 참여하고 싶은 희망 기업을 순서대로 정해도 실제로 어떤 팀으로 배정될지, 그 팀이 실제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모르는 사이에 얼떨결에 한 팀이 된 참여예술인 4명, 팀장 역할을 하는 리더 예술인, 함께 일할 기업의 담당자, 이 사업의 행정적 업무를 담당할 재단 직원까지 ‘소통’하고 ‘협업’해야 할 상대가 7명! 많아도 너무 많다. 갈등이 생길 경우의 수는 7×6×5×4×3×2=5040.  어떤 동료를 만나게 될지, 어떤 기업과 이어질지, 운명에 맡겨야 하니 운이 좋아야 하는 건 분명하다.


메가박스는 올해 처음으로 예술로 사업에 참여하는데 가치봄 영화 상영 때 뭔가 해보고 싶다고 했다. 가치봄영화는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영화 장면이나 대사를 문자와 음성으로 해설하는 배리어프리 영화다. 화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해 ‘주인공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처럼 지문을 읽고, 들리지 않는 사람을 위해 인물의 대사를 자막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농아인협회 대전지부에서는 매월 정해진 날에 청각장애인 관람객들이 메가박스 탄방동 지점을 방문한다. 가치봄영화 상영은 메가박스의 사회 공헌 사업이니 어차피 하는 김에 예술로 프로젝트와 연결해 성과를 기대해볼만 하고, 대전 내 다른 지점에 비해 손님이 적은 지점에서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로 참여했을 것이다. 기업의 담당자도 예술인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잘해보자는 두루뭉술한 말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메가박스가 현수막 앞에서 증빙 사진을 찍고 인원수를 실적으로 적어내야 하는 공공 기관보다 유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우리 예술인들은 편하게 프로젝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가치봄영화를 보러 온 시청각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예술작업이 뭘까. 장애 때문에 영화를 즐기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부분을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팀으로 모인 예술가들이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해본 것들 중에서 메가박스에서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우리 팀에 모인 5명은 예술로 사업에 2~3년 동안 참여한 ‘경력자’가 3명, 나를 포함해 올해가 처음인 ‘신입’이 2명이다. 전년의 경험을 듣다보니 대략 종료 한 달 전쯤 전시나 공연, 출판 등 발표 형식의 큰 행사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홍보 영상이나 음악, 포스터, 교육 프로그램 등 구체적으로 기업이 원하는 내용이 있을 때는 기간 내내 외주 작업자처럼 일하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메가박스에서는 ‘가치봄영화 상영과 연계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제한이나 요구 사항이 없었다. 예술가들이 알아서 예술적인 무언가를 하면 됐다. 처음 예술로 사업의 취지는 이러했을 것이다. 기업은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예술가는 안정적인 기반에서 활동 영역을 확장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예술인의 사회 참여와 안정적 수입을 목적으로 한 복지사업의 일환이다.


5~6월은 긴 자기소개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함께 뭘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예술가로서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알아야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특정 주제로 모였을 때 자기가 누군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인사하고 모임을 시작하는 것처럼 장기 프로젝트에 모인 이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예술로 사업도 처음이고,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나로서는 ‘예술’ 경력자들의 방식이 신선했다. 재단에서 받은 문서에 적힌 짤막한 소개나 다 같이 모인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멀찌감치 들은 몇 마디보다야 우리끼리 모인 회의실에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 자리에서 또 이어지는 수다를 떨다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알아가게 되었지만, 작업실이나 본업을 하는 현장에서 보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그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었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수강생들이 만든 결과물이 잔뜩 쌓인 도예가의 공방, 캔버스와 각종 도구로 가득한 화가의 작업실, 전면 거울이 달린 댄서의 연습실에 들어서면 방금까지 나와 김치찌개를 먹던 이 사람이 달라 보인다. 공연과 전시를 볼 기회가 생기면 동료를 이해하고 응원하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반하고 돌아왔다.


같이 밥 먹고 작업실 놀러가서 친해졌으니 공동 작업 이야기를 하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나중에 보니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다 팀워크가 좋은 게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느슨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리더가 중심을 잡고 의견을 제시하면 궁금한 걸 못 참고 정확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정리를 한다. 크게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 밥 먹는 데만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고, 뭐 먹으면 좋을지 생각하고 추진하는 사람도 있다. 모일 때마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늘 맛있는 걸 먹었다. 맨날 노는 것 같아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할 일의 방향을 점검하면서 가치봄 영화도 보고, 전문가에게 청각장애에 대한 자문도 얻고, 손소리복지관과 점자도서관 등 장애관련 협력 기관도 늘려갔다.

가치봄영화 상영 때 청각장애인 관객을 대상으로 행사를 기획한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가치봄 영화를 직접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구성원 모두 비장애인이고 청각장애인을 만나본 경험이 적으니 청각장애와 청각장애인에 대한 학습이 우선 필요했다. 가치봄 영화를 보겠다고 하니 메가박스에서는 무료로 입장을 시켜주었다. 첫 만남 때 영화관람권을 5장이나 줬는데 이렇게 또 신경을 쓰는 걸 보니 팀원 운만 좋은 게 아니라 기업 운, 기업 담당자 운도 확실히 좋았다. 사실 나는 업무의 일환으로 보러가는 것이니 메가박스에서 부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 말을 들어보니 이럴 때 쓰라고 초대권을 준 것 같기도 했다. 리더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치봄 영화를 보러 간다는 사실도 알릴 겸, 무료 입장 시켜줄 기회도 줄 겸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고 능숙한 사회인의 모습으로 아유, 뭘 이렇게까지..하면서 호의를 받았다고 한다.

가치봄 영화 상영 시간이 가까워지자 극장 로비에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하나둘 보였다. 기관의 담당자로 보이는 분이 명단을 확인했다. 입장 과정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지만 빤히 구경하는 게 실례가 될 듯해서 그냥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한 번 본 영화를 가치봄 버전으로 다시 보는 거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건데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청각 장애가 없는 내게는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대사 외에도 끊임없이 지문이 들리고, 자막도 지문과 대사로 가득했다. 영화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 장애 장벽을 없애는 방식이 무엇일까, 장애인을 염두에 둔 예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장애인을 염두에 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누구도 소외받지 않지 않는 예술이 가능할까. 그런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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