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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Nov 16. 2023

다양한 감각으로 영화를 만나는 법

2023 예술인파견지원사업 - 예술로 (대전문화재단) 후기 03

영화의 장면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음성으로 해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여자가 아쉬운 듯 웃는다’라는 설명을 듣고 어떤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신나는 음악, 화난 음성이라는 자막 설명이면 충분할까. 찾아보니 청각장애인을 염두에 둔 움직임 중심의 영화도 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만질 수 있는 전시 안내나 음성 해설 무용 공연도 있었다. ‘보이는 것처럼 자세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한’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느낄 거라는 짐작만 해본다. 다른 경로를 통해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온전히 새로운 감각을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가 모인 만큼 각각의 작업 경험을 모아 시청각 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우리는 장애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솔직히 장애인 관객을 상정해본 적도 거의 없다. 접근성을 고려할 때 휠체어 장애인 정도를 떠올려봤을까, 그나마도 서울에서 휠체어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러 나와 시위를 하니 이동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수어 동아리 활동을 해서 수어 기초반과 중급반을 수료했는데 모든 언어가 그렇듯 사용하지 않으면 배웠다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의 실력으로 돌아간다. 이름 석자와 간단한 인사 정도밖에 알지 못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컴퓨터를 가르쳐본 경험이나 시각 장애인과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짧은 여행을 했던 경험을 끄집어 내서 우선 관객으로 올 청각장애인에 대한 학습을 먼저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부터 비장애인과 장애인 관람객을 구별해 작업의 방향을 정하는 건 위험할 수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전문가 컨설팅을 두 번 받았다. 기획단계에서 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 대전광역시협회 윤혜주 사무처장을 모셔 강의를 들었고, 프로그램이 거의 확정되었을 때 코다코리아의 유슬기 님에게 내용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비장애인이었기에 청각 장애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가 많았고, 몇 시간의 강의나 컨설팅으로 농사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애인권운동가나 사회복지사, 활동보조인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사회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태산 같은 주제 앞에서 우리는 비장애인 예술가의 정체성을 이 프로젝트에 임하는 한계와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영화와 영화관’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시작부터 농인 당사자를 만나 함께 프로젝트를 꾸렸으면, 의미와 뉘앙스를 살리는 좋은 수어 번역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처음 시도해보는 작업인만큼 할 수 있는 것부터 일단 시작해보는 데 의의를 두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영화를 느낄 수 있을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영화를 더 풍부하게 볼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한 가지 감각에 제한이 있다면 다른 감각으로 접근해보자. 시청각이 제한된 상태에서 영화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소리를 다른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다. 시각 예술가와 댄서와 국악인이 있으니 참여형 전시와 공연으로 프로젝트의 내용은 구체화되었다. 전시장에서는 수어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업을 더 발전시켜보고, 촉각 체험으로 영화 포스터를 함께 완성해 전시하기로 했다. 영화 대사를 수어로 통역해서 영상을 전시하거나 드로잉으로 표현해보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금 소극적이었는데, 예술로 사업에 지원할 때부터 글작가의 쓸모는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특별할 게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와 관련해 글작업으로 참여할 가능성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전시나 공연을 할 때 보도자료, 행사 소개, 홍보글 등 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있으니 ‘작가력’을 아주 조금 발휘하면 일종의 스탭으로 공동작업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발군의 팀워크가 발휘되는데…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작업했으면 좋겠어요.”


리더 선생님의 한 마디가 다른 선생님들 작업에 적당히 보도자료나 써주려던 ‘예술가 자아’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실 언어로서의 수어에 슬슬 관심이 가던 참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해서 글을 쓰면서 수어로 번역된 한국어, 수어를 번역한 한국어, 한국어 입말 및 문어체 문장이 수어로 번역되면서 생기는 차이가 재미있어 보였다. 모든 언어는 1:1로 완벽하게 번역되지 않기에 뉘앙스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통역과 번역의 핵심일 것이다. 영어 번역투의 문장이 있는 것처럼 수어 번역투의 사고와 문장이 있는 것 같았다. 다 쉬운 단어로만 된 영어 문장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한국어 화자의 입말을 그대로 문자로만 보여준다고해서 그 문장을 모든 수어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모든 언어의 번역이 그러하듯이 한국어 문장은 수어의 단어로 번역되어 수어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 처음의 그 한국어 문장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 다양한 문장들을 나란히 두고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 사용자, 즉 청인으로서 그 언어들의 차이를 비교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다루고 있으니, 한국어 문장은 영화의 명대사로 정하기로 했다.

전시장의 한 켠은 영화 명대사의 한국어 표기A, 수어 영상이 연결된 큐알코드, 수어를 직역한 한국어 표기B로 구성된다. 거기에 시각 예술가인 리더(이경희 작가)의 이미지 작업물과 점자 스티커가 추가되었다. 작업물은 시트지 형태로 유리창이나 벽에 부착되어 점자와 대비되어 직역 한국어 문자로 만져지기도 할 것이다. 다른 쪽 벽은 백드롭페인팅 작품 3점이 설치된다. 물감을 섞은 테라코타를 참여자들이 맨손, 나무주걱, 숟가락 등으로 펴 발라 포스터의 배경을 채우면, 사전에 작가들(이경희, 전지현)이 만들어놓은 오브제를 그 앞에 설치하면 영화 포스터가 되는 방식이다.


공연팀에서는 소리북 연주자(권은경)와 왁킹 댄서(이다슬)가 영화와 연관이 있는 내용으로 공연을 꾸릴 계획을 세웠다. 음악 대신 소리북 진동과 댄서의 표정 연기로 스토리를 표현하고, 그 내용을 음성으로 낭독하기로 했다. 행사일에 상영하게 될 영화를 미리 알 수 없어서 공연 스토리를 영화 내용과 직접 관련되게 구성하기는 어려웠다. 행사가 진행되는 시기가 늦가을이니 가을을 표현해볼까? 영화의 배경이 가을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어지간하면 계절의 변화는 다 포함되어 있을 테니 계절의 흐름을 스토리 라인으로 잡자고 정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가면 시원한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생동하는 봄이 찾아오니 살랑살랑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해 격렬한 절정의 퍼포먼스를 한바탕 선보이고 새싹 돋는 희망의 정서로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 싶었다. 계절의 흐름으로 큰 주제를 정하면 영화 포스터도 계절을 잘 드러내는 영화로 고르면 된다. 가치봄영화 상영장이 <더 문>으로 정해졌으니 달 하나 만들고 가을 낙엽 이미지가 배경인 <비긴 어게인>과 겨울의 눈밭을 배경으로 한 <러브레터> 포스터를 만들기로 했다. 전체적인 행사명은 계절감과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선선해지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로 정했다.

수어 영상은 손소리복지관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 대사 선정부터 수어 통역, 영상 촬영 및 편집까지 사실상 모든 실무를 다 맡아서 해주셨다. 대사만 들어도 무슨 영화인지 다 아는 유명한 문장들이제법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사 선택부터 쉽지 않았다. 유명한 대사는 예능프로그램이나 인터넷에서 ‘밈’으로 사용되고 유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화적 배경에 따라 인지도에 차이가 많았다. ‘밥은 먹고 다니냐’ ‘니가 가라. 하와이’를  ‘밥 먹었어?’ ‘너 하와이에 가다’로 직역해서 보여주기가 애매했다. 영화를 본 사람만 웃거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는 적합하지 않았다. 수어로 번역하기 너무 애매한 시적인 문장도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수어 사용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획의도를 전달한 후 수어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전문가의 의견을 따랐다. 통역사에 따라 수어로 표현되는 결과도 다를 것이다. 그것까지도 언어를 다루는 전시에 포함되는 내용이 된다고 생각했다.“선선해지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의 수어도 우리가 만난 몇명의 수어 사용자마다 조금씩 표현이 달랐다. 손소리복지관에서는 수어 영상에 해당 부분의 영화 장면도 편집해서 추가로 넣어주시고, 자막도 달아주셨다. 영상에서 소리를 제거해 청인 관객이 농인의 감각으로 영화와 수어를 보는 체험을 할 수도 있었는데,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두었다.


다시 돌아갈 거야(더문),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 귀환해라(더문)의 대사들은 모두 ‘돌아가다’라는 수어로 표현된다. 한국어 입말이 말투와 목소리 크기, 억양에 따라 뉘앙스를 달리 가지는 것처럼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풍부한 표정으로 의미를 더하는 것 같았다. 찾아보니 표정과 더불어 손짓, 몸짓 등으로 수어로 번역된 문장이 아니라 수어로 씌여진 ‘수어 시’라는 장르도 있었다.


우리가 고른 대사는 아래와 같다. (링크를 누르면 수어 영상으로 연결)


우리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더문)

메이데이. 메이데이. 대한민국 우주대원입니다. 들립니까? (더문)

다시 돌아갈 거야 (더문)

지구에서 내리는 명령이 아니고 우주인들, 당신의 선택입니다 (더문)

명령 아니고 부탁이야, 귀환해라 (더문)

내 누군지 아니? (범죄도시)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명량)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극한직업)

내 얼굴이 왕이 될 상인가 (관상)

뭣이 중하냐고 (곡성)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기생충)

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금자씨)



공연팀에서는 국악 장단에 맞춰 왁킹 댄스를 추는 어렵고도 신선한 도전을 준비했다. 무대 뒤쪽으로는 공연 스토리에 맞는 영상을 이경희 작가가 그렸고 , 영상 사이에 들어간 짧은 글은 현장에서 내가 낭독하기로 했다. 전시파트에서 촉각 체험을 이끄는 전지현 작가는 공연파트에서 조명을 담당했다. 공연자가 아닌 사람도 공연에 스탭으로 참여했고 공연팀인 권은경 고수와 이다슬 댄서도 전시장 준비와 작품 설치를 함께 하면서 여전히 돈독한 팀워크를 발휘하며 행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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