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진연
‘슬로블(sloWble)’ slow+able
신라 헌강왕 때 지었다는 향가 <처용가>는 많은 이들이 알 것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 신라 편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이불 아래 다리가 넷인 거라. 둘은 아내인데 둘은 누구인가’라고. 처음 수업 시간에 배울 땐 사실 의미를 다 알진 못했다. 대체 이걸 왜 줄까지 그어가며 외워야 하는지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흘러 나이가 들고 보니 처용가 속 복잡한 상황이 생생하게 3D처럼 펼쳐진다. 일단 향가의 중요한 구절은 이불이나 다리가 아니다. 첫 구절이다. 셔블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그렇다. 이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며, 왜 처용이 화도 못 내고 춤을 췄는지 알 수 있는 포인트다. 지역은 서울. 지금의 경주. 즉 도시에서 달이 밝을 때까지 놀다 들어왔다는 것. 추측해보자면 이 날만 늦었을 리가 없다. 도시의 달밤은 언제나 놀기 좋으니.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슬로블’은 처용가의 ‘셔블 밝은 달에’서 따온 말이다. 셔블(경주)에 slow와 지속 가능한 able까지 합해서 천천히 지속적으로 경주를 밝히겠다는 뜻이라니 포부가 크다 싶다.
분명한 건 처용가의 첫 구절에 꽂혀 만든 것이란 건데, 처용네 가정사와는 상관없이 경주의 달 밝은 밤에 즐길 것이 많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경주 여행을 다녀온 후 ‘맛집이 없더라’라는 소리에 ‘맛’에 대해 쓰고 싶었고, 유명 관광지를 훑듯이 다녀온 뒤 ‘볼 것이 없더라’는 말에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물론 너무 좋았다는 경주 여행 후기에도 할 말은 많았다. 거기에 더해서 이것까지 봤으면 하는 아쉬움에.
그리하여, ’ 경주’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방송 언저리에서 제작자로 살아온 작가, 피디 직업인 3명이 모여 ‘슬로블’이 됐다.
경주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 직장 때문에 경주에 오게 된 사람. 경주 근처가 집인 사람. 답답한데 차 마시러 경주나 갈까? 가 가능한 이 사람들이 그간 보고 듣고 알게 된 경주에 대해 얘기할 예정이다. 관광객이 빠진 새벽의 대릉원이라든가. 모두가 잠든 밤늦은 봉황대의 운치에 관해서.
조금 과장해서 봉황대를 100번 간 사람들이 말하는 경주는 다를 거라는 기대를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