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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블 밝은 달에 Apr 08. 2021

경주의 맛 6

기름지지만 확실한 행복 '내남식육식당' by 진연

 한 번은 울 집 고딩이가 장염에 걸려 며칠 아팠던 적이 있다. 물만 마셔도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들락거려서 삼일 간 이온음료와 묽은 된장국만 먹였는데, 그때 아이의 찐 광기를 보게 되었다. 배는 아파도 눈치 없는 뇌로부터 먹으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받으니 애는 먹느냐 마느냐로 햄릿도 울고 갈 번뇌에 빠졌었다.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못 먹게 말리는 것이 최선의 간호였지만 저러다 장은 살리고, 성격은 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끝내 참지 못한 아이는 빵을 조금 먹었다가 된통 혼이 난 후 글을 쓰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메모장을 열어 '아귀찜', '간짜장', '떡볶이', '닭발'로 이어지는, 장염이 낫는 날 먹을 음식들의 목록을 채웠고 과장 좀 보태서 그 수가 100개는 되는 듯했다. 어느 집에서 먹었던 어떤 음식처럼 아는 맛이기도 했고, 티브이에서 본 외국의 낯선 맛과 유명 유튜버가 만든 따라 해보고 싶은 맛이기도 했다. 눈만 마주치면 먹고 싶은 음식의 영상을 보여주려고 해서 전염성이 1도 없는 장염 이건만 아이를 자꾸만 피했던 기억이 난다. 저런 집착과 광기로 공부를 했더라면. 쩜쩜쩜. 이래서 애를 키우다 보면 내 부모의 심정이 이해된다 하는 건가.


우리 애는 왜 이렇게 음식에 집착할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이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다. 그것도 내가 물려준 DNA. 나도 한동안 몸이 아파, 입맛이 없었을 때 '맛있는 녀석들'을 보고 또 봤었다. 이미 잘 먹는 그들이 더 맛있게 먹으려고 팁을 주는 것도 좋았고, 오직 '맛' 하나에 집중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도 좋았다. 그들이 사는 먹 세상에는 당시 나를 힘들게 했던 후회와 실망과 암담함이 없었다. 그냥 맛있는 순간을 즐길 뿐.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일드 <망각의 사치코(2018)> 역시 같은 이유로 좋아했다. 일드 특유의 과장 때문에 1회를 못 넘길 뻔했지만, 주인공인 사치코가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순간 무릎을 쳤다. 내가 먹는 일에 진심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그것은 식탐도 결핍도 아닌, '망각'이었다. 사치코는 성실 근면의 표본 같은 여성으로 결혼식날 남편이 될 사람이 도망가서 하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아픔이 있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맞닥뜨렸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랬듯 기계처럼 출퇴근을 반복한다.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고통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으니까. 그렇게 일만 하다가 순간순간 딴생각이 비집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는 왜 떠났을까. 내가 뭘 잘 못한 걸까' 하고.


답도 없는 생각에 고통스러울 즈음 사치코는 배가 고팠고, 우연히 들어간 식당은 맛집이었고, 그녀는 알게 됐다. 자신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엔 그 남자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잊고 싶은 기억이 날 때면 그녀는 맛집을 찾아다닌다.  


고민해봐야 뾰족한 수도 없는데 괴롭기만 한 일 때문에 심신이 피로할 때. 우리도 확실하게 '망각' 할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각종 성인병이 정문을 열고서 어서옵쇼! 맞이하는 나이지만, 이런저런 거 다 잊고 확실하게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내남식육식당'에 간다. 경주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내남'이라는 동네에 있는 식당은 처음 들렀을 때만 해도 소박하고 작았지만, 지금은 반짝이는 새 건물로 멀리서도 눈에 띈다.

이곳의 메뉴는 오직 두 가지다. 삼겹살이냐 목살이냐. 어제만 해도 고기의 지방을 일일이 떼고 먹었더라도 이곳에 온 이상 주저 없이 삼겹살을 시킨다. 기름지지만 확실한 행복이 필요한 순간이니까. 누린내 없이 고소한 우유맛 지방이 잠시나마 근심 걱정을 없애주리라. 그래서 얼리지 않은 생삼겹살을 가장 두껍게 썰어달라고 부탁드린다.

커다란 접시에 분홍분홍 한 고기가 담겨 나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깔 좋은데??!!!"를 외친다. 경주의 벚꽃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들 때 남몰래 이 집의 삼겹살이 생각 나 군침이 돈다. 흰 빛과 분홍의 조화가 꽃만큼 아름다운 고기인 것이다.  


때깔 좋은 고기를 잘 달궈진 돌판에 척 올리면 지지직 소리가 나고 그에 맞춰 어깨춤이 절로 난다. 머지않아 먹을  수 있겠구나, 설렌다. 채 익기도 전에 고기에서 고소한 기름이 흘러나오면 한 방울이라도 낭비할까, 마늘과 파채 무침과 콩나물로 돌판의 여백을 채운다. 초봄에 갔더니 미나리도 팔고 있어서, 미나리도 구웠다. 일행 중 한 명이 미나리는 생으로 먹어야 맛있다며 말렸지만 잘 구워진 미나리를 맛 보였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구워도 맛있을 기름이라며 앞장서 미나리를 굽기 시작했다. 싱싱한 삼겹살의 지방은 알고 있던 룰을 깨고,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다 밀가루 반죽만 더해서 전을 구우면 어떨까. 제주도에선 고사리를 구워 먹던데, 봄이니까 냉이나 달래를 구워도 맛있지 않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좋은 고기는 정말이지 기름마저 풍미가 좋다.

사진이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삼겹살의 풍미


그렇게 삼겹살과 함께 밑반찬 이것저것을 굽고, 된장찌개에 들어있던 냉이를 굽고, 이것마저 맛있다니!! 를 연발하다 '그래도'라며 돌아오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으니 <내남식육식당>의 자랑, 김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치를 만드는 일은 고되다. 보조만 해도 허리가 아프다. 문제는 비싼 재료비를 들여 그 고생을 하고도 맛있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래서 식당에서 수입산을 내놓더라도 납득하는 편인데, 사장님이 직접 담았다는 이 곳의 김치는 다른 반찬들을 압도할 만큼 맛있다. 알맞게 삭은 김치를 영롱한 고기 기름에 지글지글 볶아서 삼겹살에 걸쳐 한 입 베어 물면. 아. 잠깐만. 자판에 흐른 침 좀 닦고.

 

그렇다. 이것은 체면마저 망각하게 되는 맛이었던 것이다. 앞에 누가 있든, 사회에서 뭘 하든, 학교에서 몇 등을 했든 자리에서 일어서 손에 손 잡고 김치 만세! 를 외치게 된다. 흥겨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장님께 "김치가 너무 맛있네요"했더니, 지난겨울 김장을 500포기나 하셨다고. 혹시 식당의 너른 앞마당에 그 김치들이 묻혀있냐며 다시금 물었더니 딱히 땅에 묻지 않아도 이 맛이 난다고 하셨다. 내남의 공기와 바람과 온도와 습도로 익혔달까. 하마터면 남의 집 장독대를 보자며 질척일 뻔 한 걸 겨우 참았다. 파티는 끝나지 않았으므로.


봄기운 가득한 냉이 된장찌개에  지은 밥을 말아 김치를 걸쳐 먹으니  안의 한국인이 깨어났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야 뼛속까지 유교 . 애국심 충만한 상태로 식당을 나서니 하늘도 동네의 곳곳도 푸르렀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나중에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이날 회의를 빙자한 모임이었건만 일행  누구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완벽한 망각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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