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보다 가치있는 것
어떤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기고문을 읽었다. 오래도록 버티고 벼려온 그의 글은 대단히 통찰력 있었다. 드물게 맞는 말로만 가득했고, 진보적이라는 이들마저 슬쩍 모른 척했던 모순들을 쨍쨍한 직사광선 아래 훤히 보이게 널어놓고 있었다. 난 그 글이 좋았다. 그런데 동시에 저런 방식으로 훌륭해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너무 정확한 말은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화가 아니라 신탁같은 게 되어버린다. 내가 원하는 글의 힘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탁월함이 거둔 성취보다 한계가 크게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인생을 나선형으로 전개되면서 시간 흐름에 따라 점점 뾰족하게 수렴해가는 3차원 원뿔 모양의 모델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듦에 따라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앎은 늘어나고 에너지는 줄어들면서 삶은 정돈되고, 가능성은 줄어든다. 즉, 수직 이동(성장)하려면 큰 원(많은 경험과 시간)을 그려야 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더 작은 원을 그리고도 같은 높이를 이동(나이 듦)할 수 있다. 가능성이 줄어든단 건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방식이 명확해져 선택과 집중을 하며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 정돈된 삶이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눈에는 어떤 결론, 정체, 막다른 벽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이 또 당사자에겐 마침내 당도한 목적지일 수도 있겠고.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장점이 부러웠던 적은 많아도 앞선 사람의 삶을 보고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좀처럼 없다. 평가적인 의미는 아니고 호감과는 더더욱 상관없다. 그보다는 그냥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이 도달한 곳을 보면 내가 갈 수 있거나, 가고 싶은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는 저기에 도착하지 않을 거야.’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는 아니리라는 것. 내가 가는 방향의 종착지가 미지수라는 건, 호기심이 핵심 동력인 내게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기본전제다.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게 유별난 경험은 아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 본 딸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마음이다. 엄마와 다른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딸들은 엄마와는 또 다른 종류의 실패를 한다. 그럼 또 그 딸이 다른 실패를 시작하고. 인류의 발전은 아마 이렇게 진행되어 왔을 것이다. 실패, 다음 실패, 그 다음 실패… 물려줄 것 없는 사람들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무정형 이어달리기. 나는 엄마의 실패를 사랑하고 이해한다. 어쩌면 존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실패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의 이야기 읽기)
며칠 전 점심 시간, 인아가 여느 때처럼 최근 재밌게 본 걸 얘기해줬다.
“사라 아메드(호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신간이 조직 내에서 항의하는 사람들을 다룬 내용인데, 이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너무 잘 설명해놨어. …(중략)… 그걸 뭐라고 표현하냐면 벽에 머리를 찧는 일이라는 거야. 으흐하하하하(울면서 웃기) 근데 그렇게 벽에 찧어서 찧는 자국을 남겨놓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날 수 있다고, 아름답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끝나.”
벽에 남은 찧은 자국. 그날 밤 집에 걸어가는 길에 내가 그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글에서 본 게 찧은 자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통찰력을 얻기까지 그는 어지간히도 답답한 꼴들을 보며 지적 훈련을 해왔을테고, 자기 의심을 수 없이 이겨냈을테고, 이해받지 못했을테고… 버티고 버텨서 꼿꼿이 고립되고 정확한 언어를 얻어냈겠지. 그 성취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실패도 보였던 것이다.
롤모델의 부재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정말 털끝만큼도 없다. 내게는 그보다 귀한 실패의 사례들이 많았으니까.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실패로 보여질 수 있을까? 그래서 그가 그의 삶으로 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엄마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용기있게 명확한 실패를 살아내고 싶다. 어디에 당도하든 웃을 수 있을 땐 많이 웃으면서 가야지. 쉽게 살다가 잘 죽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