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재밌는 새해 일기
안나 까레니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유명한 첫 문장과(행복한 가족은 서로 비슷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서로 다르게 불행 어쩌구) 결말에서 안나 까레니나가 기차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것 정도였다. 얼마 전 밀리의 서재 구독을 시작해서 세계문학전집 카테고리 둘러 보던 중 갑자기 읽기 시작했는데… 아 너무 재밌다. 근래 나의 120부작 아침 드라마…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전으로 상권의 70% 정도 읽은 현재의 화두는… 이 소설은 사랑과 노동, 국가에 대한 소설이고 그렇다면 제목이 왜 안나 까레니나인가 라는 것으로… 안나가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이고, 실상 주인공은 콘스딴찐 레빈이 아닌지 당연한 의구심을 품게되는.(그렇지만 아님. 주인공은 안나인 게 맞긴 한 거 같음.) 아니면 ‘진짜 사랑’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전통에 대적하는 여러 흐름들 (자본주의와 공화주의, 개인주의 등등)의 핵심에 있는 모든 정념들의 정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또는 단지 그 시대에도 매력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제일 잘팔리는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제목이 콘스딴찐 레빈이라면 누가 사고 싶겠냐고…
아무튼 아휴 너무 재밌네(눈물을 닦으며)… 새삼 역시 장편소설의 매력은 총체성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로 그걸 하려고 하면 보통 지루해지는 듯.[1] 내가 읽어 본 많지 않은 장편소설 중에 그게 제일 잘 성취된 작품은 마담 보바리인데 두 작품 다 주인공들이 불륜의 아이콘이네요. 톨스토이와 플로베르를 뛰어남으로 비교하긴 어려울 것 같지만 나는 플로베르가 더 좋다. 왜냐고요. 톨스토이는 소심남 레빈을 사랑하고, 폭력남 니꼴라이를 연민하고 불륜남 스찌바를 웃겨하지만… 플로베르는 죄 없는 샤를 보바리에게 일말의 연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엠마 보바리는 안나 까레니나만큼 대단한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함.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정이란 것도 있는 거겠지. 러시아의 공간들은 너무 봉건적인 것 같다. 빠리나 런던과는 다른 것이고, 남한에서 태어난 나한테는 아무래도 영국과 프랑스의 전원과 도시가 좀 더 재밌는 스케일인가 봄. (조국 땅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탈 날을 기원하며…)
그나저나 재밌긴 한데 다 읽고나서 뭔가 제인 오스틴 소설… 하다못해 진 웹스터가 쓴 키다리 아저씨라도 읽으면서 이 러시아 아저씨의 느끼한 이성애와 휴머니즘으로부터 마음을 구마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듦. 이 직전에 읽고 있던 건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였는데, 그것도 결혼이랑 불륜얘기였네. 얼마 전에 누가 이제 퀴어가 아니면 글도 못쓰겠다 어쩌고 불평해서 욕먹었단 얘길 sns에서 봤는데, 아무래도 인제 19-20세기의 주요 소재가 결혼과 불륜이라면 21세기 서사의 메인 테마는 젠더퀴어인 게 인류사적으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정치를 다루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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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초 미레나를 시술 한 뒤 잠깐 회복실에 누워있을 때도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있었다. 미레나는 아주아주 미량의 호르몬을 분출시켜서 착상을 막는 IUD(자궁 내 장치) 피임법인데 지난 수십 년 간 쉼 없이 괴로웠던 생리통을 의료적으로 해결해보고자 전문의 선생님과의 상담 하에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소설 속 안나는 정부인 브론스끼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됨요… 미레나는 생리통에 대한 의료적 처치로는 보험 적용이 되지만 피임용으로 할 땐 적용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 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건가요?
온라인에서 검색해봤을 때 ‘미레나 짱 미레나 하고 생리 해방!’ 이라는 성공 케이스랑 ‘그거 다 뻥이다. 부정출혈 심함’이라는 정보 밖에 안나와서 좀 답답했다. 아무래도 호르몬 약은 사람마다 차이가 크긴 한 것 같다. 나는 부정출혈 정도야 뭐, 정기적인 생리량과 생리통에 비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고, 열흘 차 되어가는 지금까지 은은한 생리통이 있다. 첫 2-3일은 평소 생리통 증상이 그대로 나타나서 괴롭고 신기했는데(복통과 요통, 식은땀, 부종, 울렁거림) 4-5일 차부터는 눈에 띄게 옅어져서 이제 사라지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가슴통증이 시작됨. 배란기 증상이랑 비슷하다. 다음에 병원 가서 물어봐야지. 아마 3개월 정도는 두고 봐야 하는 모양이다.
자궁 안 쪽에 설치하는 거라 출산 여부가 시술 시 통증이랑 관련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이가 있는 지인은 시술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고. 나는 각오를 했음에도 -여러 비속어- 아팠다. 출산은 백 배쯤 더 아프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참고 있었더니 선생님이 그냥 소리 지르셔도 된다고 말해 줌. 첫 진료날 생리통 증상 듣더니 ”생리 때마다 진통제 한 팩을 다 드시는 거면 통증이 심한 편“이라고 짚어주고 피임약이나 미레나 제안해준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통증에 수용적인 곳인 것 같다. 시술 당일에도 바로 집에 가려했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얼굴이 창백하다며 약먹고 누워있다 가라고 회복실 권유해주셔서 순순히 누워있었다. 아프면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처치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왜인지 아프면 일단 참아본다가 늘 먼저 튀어나온다. 참아야 할 고통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할 수 있으면 좋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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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알겠는 건 안나 까레니나를 어디까지 읽었는지 정도. 할 일들은 밀리고, 심리적으로도 시야가 좁아지는 전형적인 악순환 패턴이 있었다. 1월 8일에 올해 망한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근데 회의 일정 넣으려고 달력을 보니 올해가 8일 지나있어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어제 큰 일 하나가 끝났고 오늘은 늘어지게 늦잠을. 꿈에 엄마가 나와 너는 얼굴이 잘 붓는다며 경락 마사지 같은 걸 해주었다. “네가 엄마 얼굴을 닮았으면 좋았을텐데”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춘천에서… 세븐틴 98즈 멤버들이 부동산 임장을 하면서(?) 외계인과 싸우고 있었다. 부승관이 결국 싸우다 죽었던 것 같음. (승관아 새해 복 많이 받아…부석순 컴백 2/6 많관부…) 마지막 꿈으로는 2023 수능을 쳤는데 생각보다 잘 본 거야. 그래서 어느 학과에서 뭘 배워볼까 생각하다가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함. 근데 포르투갈어과를 가려면 한국외대에 가야 하는 거야.(모교임) 그것만은 싫어. 그것만은…으으.. 그러다 깼다. 수능이란 관련된 꿈을 꾸준히 꾼다는 게 좀 쪽팔린다. 수능을 보고 평생 거기 집착하는 대졸자. 그거야말로 요즘 세상에 가장 시시한 한국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도 어언 예순 둘인데 뭔 수능이냐고. 하지만 사실 몰입할 것도 비웃을 것도 없다. 아무 자의식도 필요 없고 그냥 시시한 꿈을 꾼 사람으로 일어나서 멋진 하루를 시작하면 됨. 그래서 오늘은 듀오링고에서 포르투갈어 코스를 시작해보았다. um menino = a boy 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일도 계속 할 지는 모르겠지만… 작심삼일 자주 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까! 요즘 쉬는 날이면 침대에만 있었는데 몇 주만에 집 앞에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가장 작은 움직임이 뭔지 알면, 거기서부터 뭔가가 다시 이어지곤 한다. 보이지 않는, 달력에 없는 생장점.
[1] 나한테는 베르톨루치가 만든 3시간 넘는 영화들이 그런 느낌이다. 재미도 없고 훌륭하지도 않음. 마이클 치미노는 훌륭하지만 지루하긴 하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감독들은 그걸 해내. 왜지? 모르겠네... 최근에 비정성시가 다시 보고 싶었음.
[2] 아니 근데 저기 기본적으로 아기가 들고 나기에는 여자들 몸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싶음. 물론 늘어나고 유연해지고 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 거 같긴한데 생살(?)을 힘껏 잡아 당겨야 하면 너무 아픈 게 당연하잖아. 자궁이 주먹만하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 어째서 애초에 출산하는 몸이 출산안하는 몸보다 더 큰 몸으로 성장하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지 않은 것이지? DNA야 대답해. (D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