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없는 책임
지난 밤 한 십대 여성이 인터넷 라이브 생방송을 키고 투신자살했는데(뉴스 보도 됨), 고인이 활동했던 디씨 우울증 갤러리에 지속적으로 어리고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해 착취할 목적으로 모인 그룹이 있다는 정황을 고발하는 트윗을 봤다. 해당 그룹에 대한 제보를 받는 언론사들의 트윗도 봤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아득해지면 그 아득함만큼 민망함이 되돌아 온다. 세상 어딘가에서 비참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의, 나의 눈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서. 어쩌면 그렇게 아무것도 못봤을까. 아무래도 어린 사람들이 그 근처에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우울증에 대한 정보가 궁금해서 그런 갤러리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거기서 단 몇 번이라도 말이 통한다고 느꼈을까? 나도 어릴 때 “정신병원”에 가보고 싶었다. 혼자 있을 때 자주 우는 것 뿐, 아무 일도 중대한 일도 없었지만 혹시 무언가가 나아질 수 있을까 막연한 마음으로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부모에게 말하는 수 밖엔 없었다. 돈으로 보나 의료보험으로 보나. 근데 경험 상 무엇이든 엄마 아빠에게 말해서는 좋을 것이 없었다. 친구 얘기도, 좋아하는 음악 얘기도, 내 기분도. 그래서 그냥 계속 혼자 울지 뭐. 부처도 인생은 고통이랬어.(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 윤리) 그런 식으로 대충 퉁치고 말았다. 우울증 갤러리 같은 것도, 다른 어떤 게시판도 못 찾았다.
그 나이 즈음의 어느 토요일 여름, 사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얘가 한참을 오지 않았다. 한낮 볕이 쨍했고, 하복을 입고도 더웠다. 시내지만 인적이 드문 사무빌딩 앞이었는데, 어떤 젊은 남자가 내 눈을 힐끗거리며 다가왔다. 혹시 버디버디 안해요? 안하는데요? 버디버디에서 만나기로 한 분 아니에요? 아닌데요? 그 사람은 조금 떨어져 계속 거기 서있었다. 슬리퍼에 트렁크 같은 반바지에 대충 봐도 정돈이 안된 모습이었다. 친구는 30분을 넘게 늦었던가. 그 남자는 내가 한참을 그냥 거기 있자, 한 번을 더 물었다. 진짜 버디버디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이내 친구와 별 일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거 봐 거짓말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 정도 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텐데.
또 그 나이 즈음, 같은 학년 여자애가 가출에 등교거부를 시작해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나도 친구의 친구의 친구랄까. 그 정도로 이름과 얼굴 정도 아는, 조용한 애였는데 일주일 뒤 9살 연상의 어느 고시생과 동거를 시작해서 가출한 거란 소문이 퍼졌다. 그 애의 친구와 친구인 내 친구는 자세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나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 애 엄마가 친구들에게 대신 설득을 부탁해서 직접 만나고 왔다는 얘기였다. 그 애는 마치 부인처럼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남자는 그런 일을 감행할만큼 잘생기지 않았고, 식당에서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는 모습이 별로 그 애를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신 차려. 너네 오빠 나이도 많고 완전 별로야. 친구들의 말에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오빠가 내가 예쁘대. 나 예쁘다는 말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 엄마한테도 들어본 적 없어.”
그 다음 해에는 내 친구가 가출해서 그런 게 남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그 애에게 비밀로 하고, 그 애가 거짓말을 해 얻은 알바처의 사장에게 걘 부모 없이 상경한 애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야 하는 애라고 이야기 했다. 친구를 배신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친구의 계획은 너무 동화 같았고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걔네 가족의 복잡한 사정은 좀 잔혹동화 같았지만. 그래도 현실보단 거기가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앤 꽤 쿨하고 멋지긴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을 쉽게 경멸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동경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평가하는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이었네. 그러니 자기혐오를 하며 밤마다 울지.)
나는 PC통신이 저물 무렵에 처음 인터넷에 접속해봤다, 초5/여/설(서울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라는 뜻)을 달고 처음으로 채팅방에 입장했을 때 한꺼번에 날아왔던 쪽지들을 기억한다. 중3이라는 사람부터 군인이라는 사람까지. 나는 겁도 많고, 남자가 싫었기 때문에 그에 응하지 않았고, 어떤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냥 채팅방에 접속하면 으레 거치는 절차처럼 익숙해졌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들이 인터넷이라는 드문 문물을 구경하러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걔네는 이 스팸들을 받고서는 냅다 대답을 보내보자고 했다. 음? 응답을 보내니 상대는 뭐가 그리 급한지 얼굴을 보자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들은 꺄아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안된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전화라도, 폰섹이라도 하자고, 해보면 재밌다고 답이 왔다. 폰섹이래. 우리는 또 소리를 질렀다. 섹스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폰섹은 뭘까? 깔깔깔 좋아요. 앗 근데 엄마한테 말하니까 하지 말래요. 애원하는 상대에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놀리다 메시지창을 종료했던가. 이렇게 적으니 마치 우리가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이었던 것 같다.
난 아마 이제 어린 여자에서 거의 벗어난 것 같다. 오늘 이런 뉴스를 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아득해하는 걸 보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동시에 떠올라 적고보니 그렇다. 이런 일은 내가 어릴 때에도 늘 일어날 수 있었고, 일어나고 있었다. 경악스러운 건 그 비인간성과 끔찍함이지, 사건 발생 자체는 아니다.(드러나지 않은 악행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사회에선 항상 어떤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쉽게 어린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어 왔던 것이다. 근데 이젠 인터넷 덕분에 악의들이 연결되고 집적되어 접근성만 넓어진 게 아니라 더 깊어지기까지 한 것 같다. 아주 많은 악의들이 아주 많은 사람을 아주 오래 착취하고, 결국 그 중 몇은 죽일 수 있을만큼.
세상엔 원래 어딘가 소속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고 싶어하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결코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사실상 누구나 그렇다. 그걸 문제로 지목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떤 남자들이 그 중 더 절실한 여자들을 ‘우울증’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해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걸, 집단지성으로 알아냈다는 것이고, 그 집단지성은 단체로 성적 착취에 돌아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 걸 재밌어 할만큼. 심지어 거기에서 어떤 우월감을 느낄만큼, 사회에서 격리될 필요가 있을만큼 어딘가 고장나고 훼손된 인격들. 그리고 그 남자들에게 죽으러 가는 사람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LTE니, 5G니 하는 인프라는 지금 우리도 같이 쓰고 있는 그 망이다. 아이들은, 특히 여자아이들은 어두운 길로 다니지 말고, 모르는 아저씨가 말을 걸면 따라가지 말라고 주의를 단단히 받지만…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우울증 검색하지 말고, 트위터에 정병 트윗하지 말고, 우울한 사진 올리지 말으렴? 나쁜 사람이 DM 못 보내게?
‘남자친구가 생기면, 걔랑 빨리 자버려야지. 얼른 해치워버려서 섹스가 뭔지 알아내야지.’ 친구들이 가출하고, 길에서 이상한 남자가 말 걸던 무렵 즈음의 난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시작된 ‘여자’를 보는 세상의 눈초리가 조금 징그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엄마의 눈초리도, 공익근무요원의 눈초리도 정반대같지만 똑같이 징그러웠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내고 싶었던 건 섹스라기보다는 그거였다. 섹스를 아는 세상이 대체 정확히 어떤 시선으로 우리를 보는 건지. 마침 그 무렵 내게 유독 절실했던 어떤 남자애랑 사귀고 그렇게 했는데, 걔랑 연애를 하면서 자해하는 것도 보고 그랬다. 당연히 상처였다.(폭력이라는 단어를 참아봤다.) 우울증에 걸린 남자친구라는 건. 어이없게도… 내게 상처를 주었다.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과는 다르게.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을 착취한 남자들과는 다르게 내가 걔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사람으로 봤기 때문인지.
취직을 하고 돈을 벌다가 힘들어졌을 때 정신과를 찾았다. 처음엔 남자 원장이 있는 곳에 갔다가 얼마 안 있어서 여자 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찾았다. 내 마음이 편해야 했으니까. 초진비를 내면서 큰 돈이 나가서 큰 일이라는 생각은 안했다. 할부를 긁든 어쩌든 그 돈은 쓸 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 없으니까. 우울증 진단을 받은 뒤의 시간은 조금씩 나에 대한 긍정적인 통제력을 높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왜 자살사고 증상이 있는 어린 여자들은 내가 아니라, 돌아버린 남자들과 연결되게 된 걸까. 더 가까운 건, 더 적절하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대상은 나였을 수도 있는데. 알 수 없다. 증상이 그 사람의 전부인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여자, 남자, 섹스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은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가부장주의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강간문화 얘기겠지만 그런 얘길 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래도록 잘못되어 있었지만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이 그걸 한층 다른 방향으로 타락시키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전쟁이 강간을 더 잔혹하게 증폭시켰듯이.
병원에 가서 한 두 주간 잘 지낸 이야기, 잘 못 지낸 이야기, 불안감이나 죄책감을 느낀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은 내게 늘 통제 이슈가 있다고 말한다. “본인 책임이 아닌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게 사실은 세상을 뜻대로 하고 싶은 통제 욕구일지도 몰라요.” 맞는 말이다. 나는 부모도 아니고, 하물며 조카도 없고, 교사도 아니고. 어린 사람들이랑 너무 멀리 있고,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이해관계자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서 그 거리감만큼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게 나의 통제 이슈다. 정신과에서 약물치료 만큼이나 중요한 건 인지행동치료이므로, 나는 이건 내 책임이 아니라는 인지를 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그리고 죄책감에 곧장 반응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행동은 어떤 방향으로든 통제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영향력의 실마리를 찾는 방향으로 해야할 것 같아요. 라고 말하면 선생님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는 듯한 표정(실은 늘 일관된 표정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을 하고, 나와 세상 사이에 “경계”를 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고 우울증에 걸린 거지, 우울증 나고 내가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 문제는 어쩔 수가 없다. 경계없이 헤매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