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와의 첫만남
알고보니 진짜 바보같은 말이였다. 동물권 단체 활동가들 앞에서 “언젠가”, “처지가 되면” 개를 입양하고 싶다고 하다니. 불난 집 앞에 서서 이따 시간 나면 돕겠노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한가한 소리... “입양”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잠깐 보고만 가라며 이끌려 간 카라 아름품에는 입양을 기다리는 개랑 고양이들이 한 눈에도 열댓 마리는 있었다. 얼마나 사정 모르는 소리를 했던 건지 대번에 알 수 있었지만 뭐 그런 반성을 깊이 할 겨를도 없이 호기심 많은 작은 개들이 냅다 반기고 안아달라며 정신없이 보채서 손이 바빠졌다. 의젓한 큰 개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보다 금방 태연해졌고 어떤 개들은 친한 활동가들에게 냅다 안기기기도 했다.
아이구 예뻐. 아구 착해. 천사 아기들아. 하지만 정신 줄을 잡자. 우리집은 뭐랄까, 불난 집은 아니어도 물 새는 집 쯤은 된다. 무리해서 이사한 뒤로 마이너스 통장이 도대체 줄어들질 않았고, 일을 줄일 처지도 안되는 일인 가구인 나. 같이 사는 친구도 바쁘긴 매한가지라 개를 돌볼 처지는 정말이지 못된다. 그 외에도 개 못키울 이유 천 개… 근데 그때 정강이에 무언가 와닿았다.
툭.
그것은 내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였을지도. 이 개, 럭키는 기세 좋은 개들이 이미 예쁨받고 흩어진 뒤에야 뒤늦게 느릿느릿 다가와 머리를 툭 가져다 댔다. 앞발을 들어 보채지도 않고, 올려다보지도 않고 그냥 머리를 가져다 대고만 있었다. 그건 어딘가 처량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무신경한 제스쳐였고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랑하는 개, 도레를 떠올리게 했다. 생각해보면 전혀 도레같은 행동이 아닌데 어째서 그랬을까? 그치만 나는 멋대로 럭키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설픈 비반려인의 손길을 부드럽게 만끽하는 럭키. 너는 어쩌다 여기에 있니? 7년만에 파양당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럭키 대신 활동가님이 알려주셨다. 책가방만한 길이에 희끗한 회색 털, 열두 살의 럭키는 노견에 중형견으로 분류되는 개였다. 작고 어린 개에 비해서는 입양 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나는 조금 무거워져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럭키가 마음에 뭔가 툭 얹은 것 같았다. 보드랍고 걱정스럽고 순한 무언가를.
두 달 뒤 럭키는 우리집에 왔다. 말끔하게 이발을 하고, 톡톡 가벼운 발걸음으로 켄넬에서 나와 낯선 집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기세 등등해보였다. 종일 긴장한 채로 밥을 챙겨주고 유튜브에서 찾아 본 기본 교육 같은 걸 흉내내봤다. 럭키는 먹을 걸 좋아하고, 앉아와 손을 할 줄 아는 듯 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세상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실수하면 어쩌지? 내가 잘 못챙겨서 아프기라도 하면? 개의 코골이는 영장류의 거대한 뇌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을 간지럽혀 무장해제시키는 웃기는 소리였다. 나는 나를 불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능숙하게 안심시키는 이 털친구의 존재에 어색함을 느끼며 순순히 잠들었다.
럭키를 훨씬 잘 알게된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사실 그때 럭키도 전혀 태평하지 않았다. 새 인간 새 집에 대해 꽤나 긴장하고 눈치를 보고있었다. 지금의 응석받이에 비하면 어찌나 의젓하고 예의 바른 개였던가…(그리운 건 아님) 게다가 그 코골이는 기관지가 안좋아서 나는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고 한 바탕 대청소를 하고난 뒤로는 다행히 사라졌다.
함께 사는 넉달 간 나는 엑스레이와 초음파로 럭키의 뼈도 장기도 다 들여다보았고, 성격도 더 잘 알게 되었고, 어쩌다 처음 구조되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건 도대체 어디서 툭 가져다 대는 걸 배웠냐는 것이다. 그렇게 툭. 참내. 모르겠다 천재 개야 그런 것이 운명이라는 거겠지. 열두 살 할아버지 럭키의 ‘툭’에 영원히 압도적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