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즐거움

시작은 카페였다

by 해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오랜만에 다리를 걸어야지. 다리 건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카페에 가야지. 진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냐는 내일 눈 떴을 때의 기분에 달렸지만 일단 계획은 세운다. 지난 2주간 몸과 마음 모두 고장 난 탓에 침대에서 나올 수 없었다. 이번 주말엔 나가고 싶다. 햇볕은 게으른 사람도 밖으로 끌어내는 힘이 있다. 내일은 태양의 부름에 응해 오전에 부지런히 나가야겠다. 작고 소중한 통장을 돌보느라 음료값이 너무 올라버린 카페에 언젠가부터 발길을 거의 끊고 지내는 터였다. 카페에서 혼자 시간 보내는 것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이를 포기할 정도로 이제 뉴욕에서 라테류를 마시려면 7, 8불이 훌쩍 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도 내일은 가야겠다. 오랜만에 카페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원 돈으로 70프로 이상 확정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꽤 괜찮은 투자일지도 모른다. 엥겔지수가 높은 사람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관대해진다.


그렇게 토요일 아침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유튜브는 눈 뜨자마자 나를 침대에 묶어 두었다. 하마터면 그 상태로 게으름의 관성에 질 뻔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앞선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전혀 비가 올 기미가 없다. 날씨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가벼운 나일론 크로스백에 이북 리더기, 노트, 펜을 넣어 집을 나섰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는 대견함도 잠시. 후드득후드득.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머리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미 비가 오고 있었는데 집에선 못 본 건지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춘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비가 온다는 것이다. 건물이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갈까 계획대로 밀어붙일까. 고민하며 일단 걷는데 사람들이 맑은 날씨처럼 돌아다닌다. 이 정도 비로 다리를 못 건널 일은 아니지. 비를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것도 나름 신선한 경험일 것 같다. 그대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맨하탄으로 연결된 퀸즈보로 브리지로 향했다.


다리 입구로 들어서 여느 때처럼 부지런히 걷는데 뭔가 기분이 좀 싸하다. 토요일 주말에, 아무리 비가 조금씩 내린다 해도 조깅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다리에 사람이 너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나 밖에 없다. 비가 오든 폭설이 내리든 상관없이 달리는 뉴요커들이 오늘은 너무 조용하다. 묘한 기분을 뒤로하고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잠시 멈춰 다리 아래로 보이는 루즈벨트 아일랜드며 나를 제치고 달려가는 자전거들도 렌즈에 담았다. 더 이상 굵어지지 않고 얌전히 내려주는 비까지, 카페에 도착하기 전부터 설레었다.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다리의 절반을 지났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도를 줄여오는 것이 아닌가. 설마 다리 위에서 "도를 아십니까?". 한국인이라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강 위 다리 한복판에서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남자는 내 앞에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남: 이 길은 이제 자전거랑 어쩌고 저쩌구들만 다닐 수 있어. 걸어서 다니는 길이 반대쪽에 생겼어. 그러니까 지금 걸을 때 조심해야 돼.

나: 오 마이 갓! 언제부터 바뀌었어?

남: 2주 됐어.


도믿남에서 젠틀맨으로 곧장 신분이 상승한 그는 백마 대신 타고 나타난 자전거 페달을 다시 힘차게 밟으며 사라졌다. 젠틀맨은 조금 전 나를 제치고 앞서나간 두 명의 조깅맨들에게도 같은 얘기를 한 것 같다. 그의 친절함에 대한 감동과 도보가 금지된 곳을 걷고 있다는 민망함이 뒤섞여 최대한 다리 가장자리에 몸을 붙여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자전거 벨을 땡땡땡 요란하게 쏘아대며 나를 질책하듯 속도를 높여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다리의 끝을 지나 맨하탄에 발을 내렸다. 지도를 켜 어제 미리 찾아본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동네 카페다운 아담한 공간은 주말의 북적임 없이 여유로웠다. 카페라는 공간은 신기하게도 들어선 순간 "잘 왔다", "오늘은 실패다"의 판단이 빠르게 들고 대부분의 경우 직감은 적중한다. 두 개의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고 창가 자리마저 비어있는 이곳. 오늘 난 이곳에서 행복할 것이고 이곳을 사랑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이스 마차라테를 시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에 일기와 이것저것 생각들을 끄적이고 책을 읽는다. 카페에 앉아 있던 두 쌍의 남녀 커플들이 차례로 떠난다. 붐비지는 않지만 적당한 활기를 줄 정도의 새로운 손님들이 계속 들어온다.


손님 1: 카페 언제 오픈했어?

주인: 이제 삼 주 됐어.


동네 주민인 것 같은 중년 여성들, 개를 데리고 온 여자, 삼삼오오 무리 지어 들어오는 사람들, 길을 걷다 카페를 힐끗 보더니 되돌아와 카페로 들어온 레깅스를 입은 여자...


손님 2: 카페 언제 오픈했어?

주인: 이제 삼 주 됐어.

손님 2: 그렇구나. 나 이따가 또 올 거야!

주인: 고마워!


상대편만 바뀐 채 같은 대화가 서너 번 반복됐다. 삼 주가 된 이제 막 오픈한 카페. 뉴욕에 원래 살던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카페를 열었을까. 설렐까. 두려울까. 눈은 노트를 향하고 펜을 움직이고 있지만 동네 주민들과 이제 그들의 새로운 이웃이 될 카페 주인의 목소리에 신경이 집중된다. 러시아 사람들 같기도 남유럽 사람들 같기도 한 주인들은 손님들에게 이것저것 권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카페 테이블의 손님들이 몇 차례 바뀌고 나서야 나도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빗방울이 아침보다 굵어졌다. 다시 삼십 분 정도 다리를 걸어 집에 돌아가하는데 지금 화장실을 가지 않으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질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 카페의 유일한 단점은 화장실의 부재였다. 다행히 바로 건너편에 티제이 맥스라는 할인 매장 있어 화장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고작 화장실 하나 가려고 들른 것일 뿐인데 변수로 생긴 동선에 기분이 또 즐거워졌다.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에 없던 우연에서 빚어지지 않나. 일상의 이 작은 우연이 뭐라고 즐거움을 주는지. 즐거워지는 방법은 의외로 별 것 아닌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틈에 껴서 빼곡히 걸린 티셔츠와 여름 바지들을 괜히 한번 훑어보며 혹시 뭐 괜찮은 거라도 발견할까 옷걸이들을 뒤적거렸다.


티제이 맥스를 나오니 빗줄기가 꽤 거세져 있었다. 이렇게 쏟아지는 소나기는 조금 있으면 그칠 테니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겸 장을 보러 바로 옆 트레이더 조에 뛰어들어갔다. 동네에 있는 트레이더 조 보다 3배는 클 법한 이곳에 올 때마다 다른 도시에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규모가 큰 만큼 평소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제품들도 많다. 좋아하는 일 1위가 새로운 카페 가기, 2위가 마트 구경하기라 오랜만에 마트 구경에 또 마음이 설렌다. 백화점에 신상을 구경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열대를 한 칸 한 칸 돌며 새로 나온 제품들을 스캔했다. 이건 우리 동네에서 안 팔던 꽃인데! 이 과일도 처음 보는 건데! 그렇게 하나씩 장바구니에 추가하다 보니 두세 개 가볍게 사려던 계획과 다르게 다리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지 걱정될 만큼 짐이 한 바구니가 됐다. 메고 있던 크로스백과 쇼핑백에 잘 나눠 담고 식료품으로 종이가방가 꽃까지 들고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큰일이다. 열린 문 밖으로 굵은 빗줄기들이 물을 들이붓듯 아스팔트를 때리고 있다. 마트 입구는 각자의 장바구니를 들고 문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비가 잠잠해질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예측이 아니라 기대일 뿐이었다.


마트를 한 바퀴 더 둘러보고 돌아왔지만 비는 가늘어질 기미조차 없었다. 종이 쇼핑백으론 비를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다시 집어 계산대로 가 짐을 옮겨 담았다. 불필요한 소비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고 이 기회에 이렇게 새 장바구니를 갖는 거지 뭐.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시간, 장바구니 때문에 추가로 지출된 4불, 비를 쫄딱 맞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 배터리까지 모든 상황이 짜증 나지 않았다. 7달러로 산 카페의 행복은 사람을 온화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은 재미난 해프닝일 뿐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하늘색 천 장바구니를 메고, 왼손에 꽃을 들고 출입문으로 돌아왔다. 빗 속으로 뛰어 들 준비가 되었다. 버스 정류장의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고 달리기 출발 총소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게 앞 신호등을 노려본다. 파란불이다. 가방을 끌어안고 정류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미 꼬질꼬질한 운동화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달릴수록 얕은 비명이 나온다. 장바구니를 오른손으로 소중히 감싸며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정류장으로 뜀박질한다. 작년 여름, 지금보다 더 공격적으로 비가 쏟아지던 날이 있었다. 하필 퇴근 시간에 딱 걸렸고 또 하필 리넨으로 된 점프슈트를 입은 날이었다. 차마 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다 오늘처럼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가방을 안고 집까지 달렸다. 비에 젖었다기보다 어디서 잠수를 하다 왔다고 해야 할 정도로 비에 절여져 집에 도착했다. 물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런 내게 "웃기겠다"라고 큭큭거리며 카톡을 했던 남자가 있었다. 길을 달리는데 그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운이 좋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삼십 초도 안되어 버스는 도착했다. 비에 젖은 짐과 빗물을 실컷 먹은 빨간 꽃을 움켜쥔 채 헉헉대며 버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 순간에 안도감이 몰려들고 갑자기 나른해졌다. 버스는 손님들을 기다리며 이삼 분간 멈춰 서 있고는 다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는 네다섯명의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버스에는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내딛는 소리, 창문을 떄리는 타닥임만이 지치지 않고 울렸다. 빗방울이 가득한 창문 밖으로 허드슨 강과 루즈벨트 아일랜드와 다시 허드슨강과 퀸즈가 차례로 스쳤다. 모든 곳이 회색이었고 젖은 세상뿐이었다.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힘껏 움켜쥐고 있던 꽃을 그제야 바라봤다. 빗물이 앉은 새빨간 꽃잎들이 유독 싱그러웠다.



6.7.20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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