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는 인생

2025년 12월 말의 뉴포트 여행기

by 해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삶에 수없이 실망을 하면서도 자꾸 잊어버린다. 완벽한 계획이 원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은 무모한 믿음. 고작 이틀밤을 자고 돌아올 가까운 여행지를 고르는 것에서조차 그랬다. 이 주가 넘는 시간 동안 여행지 별 숙소과 교통편, 여행 루트를 짜고, 유투브에서 여행 후기 영상을 찾아보며 각각의 시나리오를 수도 없이 머릿속에 돌렸다.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날 정도로 고민을 한 끝에 여행 출발 삼 일 전 가까스로 숙소와 버스를 예약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약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프로비던스라는 소도시에 숙소를 잡고 구경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한 시간가량 떨어진 뉴포트에 겨울 바다를 보러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에 겨울 바다라니, 이보다 완벽한 여행 계획이 없었다. 게다가 실내 수영장에 온수풀이 있는 호텔까지 예약한 것이다. 한 겨울 바닷바람을 종일 맞으며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와 뜨끈하게 몸을 데울 생각을 하니 일 년 동안 휴가를 가지 않은 것을 모두 보상해 줄 여행이 될 것 같았다.


프로빈스에 도착한 첫날, 예상치 못하게 상점들이 대부분 연말 연휴로 문을 닫아 있었다. 작은 대학도시인 프로비던스는 방학과 연휴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비어있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미술 대학의 기념품 가게도 지도 앱의 정보와는 다르게 굳게 닫혀 있었다. 사람들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뉴욕에 질릴 대로 질린 내게 예상치 못한 적막은 오히려 반가웠다. 문을 연 카페 찾기를 세 번만에 성공해 점심을 먹은 후 텅 빈 학교 캠퍼스와 거리를 무작정 걸으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그날 밤 일어났다. 멀쩡하던 내일 날씨가 순식간에 눈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 밤 눈이 어마어마하게 올 거라며 걱정을 하는 투숙객의 이야기가 들렸다. 뉴욕에 눈이 오고 있다는 문자도 친구로부터 도착했다. 미국 동부 도시들에 일제히 폭설이 오는 모양이었다. 여행에서 기상 이변으로 발이 묶여 제 날짜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암막 커튼을 열어 날씨를 확인했다. 누군가가 창 밖을 하얗게 칠하기라도 한 것처럼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이 뒤덮여 있었다. 다행히 눈은 그친 후였고 어젯밤 우려하던 만큼의 상황은 아니었다. 누가 집 밖에 나간다고 하면 뜯어말릴 날씨에 바다까지 찾아가야 했지만 어쩌겠는가. 위, 아래로 발열내복을 입고 털모자, 목도리, 코로나가 끝나고 집에 남아돌던 지긋지긋한 KF94 마스크까지 쓴 채 뉴포트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나섰다.

버스는 한 시간가량 조심스럽게 눈길을 달린 후 종점인 뉴포트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아직 사람들이 거의 밟지 않은 두터운 눈이 길을 뒤덮고 있었고 나와 같이 버스에서 내린 두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한참 눈길을 걸어 들어간 카페에서 몸을 녹인 후 본격적으로 바닷가 근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다. 여름 휴양지로 관광객들이 찾는 바닷가 도시 뉴포트는 프로빈스 못지않게 한적했다. 예상치 못하게 내린 눈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쓸쓸할 뻔했던 여행의 모든 장소들을 비현실적일 만큼 낭만적으로 바꿔버렸다. 처음 와 보는 낯선 여행지는 가득 쌓인 눈 때문에 원래의 풍경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날씨가 만든 완벽한 변수는 추위 따위는 기쁘게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일부러 눈이 더 많이 쌓인 길을 골라 밟으며 드디어 해안선 절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로에 다다랐다.


그리 높지 않은 절벽 아래로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검은 바위에 파도가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흰 포말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도가 조금 더 셌으면 얼굴에 물이 튀길 정도로 꽤 가까운 거리였다. 어젯밤 눈이 지나간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했고 바다 저 편으로는 눈 덮인 집들이 조용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발걸음 소리 외에는 오직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차가운 소리만이 겨울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난간에 기대 파도가 겹겹이 다가왔다 부서지는 모습을 한 참을 바라보다 걷기를 반복했다.


저 멀리 파도 사이로 검은 부표 같은 것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졌다. 꼭 사람이 물에 빠져 머리가 둥둥 떠다니는 형상이었다. 검은 물체는 거친 물살 때문에 파도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 참을 저 멀리 떠다니던 형체는 점점 해안가 쪽으로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 서핑보트 위에 엎드린 전신 수영복을 입은 남자로 변하더니 바위 위로 걸어 올라오는 것이다. 한겨울 파도 속을 홀로 뛰어드는 인간이란. 그 원초적인 용기를 넋을 잃고 바위 위에 돌아서 파도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얼마나 오래 바닷속에 있었을지 모를 그 사람은 어떻게 절벽 위로 올라왔는지 의문을 남긴 채 나를 지나쳐 유유히 사라졌다.


저녁이 되자 하늘이 금방 어둑해졌다.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프로비던스로 향했다. 네다섯 사람이 앉아있는 버스에는 누구도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길 양쪽에 장식된 작은 전구들이 버스 앞 창 너머에서 나타나고 사라졌다. 하루 종일 눈길을 밟으며 걸어 다닌 피로가 쏟아졌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 명절 귀성길에 밤새 운전하는 아빠 차에서 잠들었다가 집에 도착해 억지로 일어났을 때 느꼈던 그 피로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늘로 여행의 대부분이 끝났다. 문득 일 년 전 이맘때 따뜻한 미국 남쪽으로 혼자 떠난 여행이 생각났다. 잊고 싶은 기억도 슬픔도 다 그곳에 떨구어 놓고 돌아오고 싶었던 여행. 기필코 과거와 작별하고 회복하게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비장하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달라져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아무리 결심하고 애쓴다 한들 갑자기 변하는 날씨처럼 인생은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던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란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굳이 어떻게 살 필요가 있나. 애쓸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잊는 것, 회복하는 것, 사는 것에서조차 말이다.


버스가 프로빈스에 도착했다. 여행의 마지막 밤, 조금이라도 거리를 더 걷고 싶었지만 잠시도 밖에 서 있지 못할 만큼 몸이 아려왔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 따뜻한 물어 몸을 녹이려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였고 이 호텔에서 묵는 이유가 바로 오늘 밤이었다. 호텔 온수풀에 몸을 담그고 앉아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고 물에 한기만 돌았다. 마침 지나가는 스텝에게 수리를 요청하고 수영장 의자에 앉아한 참을 오들오들 떨며 뜨거운 물을 기다렸지만, 결국 사용 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었다. 급하게 방으로 돌아와 샤워꼭지를 가장 뜨거운 쪽으로 돌려 한 참 동안 언 몸을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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