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릴 줄이야
“여보세요, 거기 아트앤하트 미술학원이죠?”
“네, 맞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림을 좀 그리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상의를 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그 학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아 네. 취미로 하고 싶으신거죠?”
“네, 그런 셈이죠. 저같이 성인이 학원에서 그림 그리시는 분들이 있나요?”
“그럼요. 몇 분 계세요. 혹시 이전에 그림을 그려 보셨나요?”
“아뇨, 사실은 처음 해보는 거에요.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에 해봤던 것 밖에는 없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기초를 조금 배우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네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어요.”
“네 그러면 언제 시간 되실 때 한번 들러주세요. 설명을 드릴께요.”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동네에 있는 미술학원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나로서는 꽤 용기를 낸 것이었다. 오며 가며 눈 여겨 봐 놨던 미술 학원인데, 노란 학원 버스도 다니고 학생들이 들락달락 하는걸로 봐서 입시 위주의 학원으로 생각 했었다. 안된다면 말자고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가능하다는 답을 들어 기분이 몹시 들떴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이렇게 해서 나의 그림 그리기는 시작이 되었다.
그 때는 2014년 가을이었다. 나는 40년 이상을 살아왔던 서울을 떠나 잠시 대전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한 대학의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얼마동안 대전에 있을지는 몰랐지만 연구원 계약이 2년이었으니, 최소 2년은 있겠구나 생각 했다. 그 후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취직도 안되고 이일 저일 알아보며 전전긍긍 하던 나에게 일자리를 얻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전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만 빼놓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부산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와 아내 단 둘만 내려오면 되었다.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다. 잘 하던 서울 생활을 놔두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지방으로 내려오게 만들었으니.
“여보, 미안해.. 우리가 또 이사를 하게 생겼네.”
“하는 수 없지 뭐. 이렇게 지내는 것보단 계약직이지만 일자리를 얻었으니 가야지.”
“그래.. 대전에 있으면서 또 좋은 기회를 찾아볼게.”
“그래야지. 그런데 나 대전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는거 알지?”
“알지. 결혼 하자 마자 내가 울산에 데리고 내려가 고생 시켰잖아.. 그 때 자기 밤마다 울었던 것 생각하면.. 에휴.”
“미국에도 2년 있었고 서울에서도 몇번 이사를 했으니, 도대체 우리가 이사를 몇 번 했는지 다 세지도 못하겠다. 아 이젠 이사 지겨워.”
“우리 팔자가 왜 이러냐.. 에궁.”
“그나마 울산보다는 서울에서 가까우니 다행이긴 해.”
“맞아. 주말에는 서울에도 가고 여기 주변 관광도 하고 그러면 여행 다니는 기분 비슷하게 재미있을 것 같네. 하하.”
우리 부부는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다. 그런데 40대 중반이 넘어서 지방으로 또 내려 올거라고는 예상을 못했었다. 아내에게 정말 고마웠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이 어떨지는 짐작이 되었다.
다음날 나는 일을 마치자 마자 미술학원으로 갔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좋은 원장님이 나를 반겨 주었다. 처음 만났지만 막걸리라도 같이 마시고 싶은 서글서글한 옆집 아저씨 느낌이었다. 나는 매주 수요일 업무를 마치고 저녁시간에 두세시간 작업을 하기로 했다. 대학의 연구직은 일이 적은건 아니었지만 과제나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기 때문에 시간 조정이 어느정도 가능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는 기초 드로잉부터 시작해서 사물을 스케치 하는 법을 배웠다. 너무 재미가 있어서인지 학원에서의 두세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게다가 처음 치고는 잘한다는 원장님의 칭찬을 들으니 더 열심히 했다. 매주 수요일이 기다려 지기까지 했다. 늦은 나이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마치 탁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머리속을 환기시켜주는 느낌 이랄까. 뭐 그와 비슷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의 장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않고 말한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몰입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그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아지경 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쨋거나 그 시간 만큼은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지 않는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케케묵은 찌꺼기 들을 걷어 내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세포로 채우는 느낌이다. 머리가 맑아진다. 세시간을 서 있어도 힘들지 않다. 그리고 무엇 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을 주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몰입해서 하는 것. 이게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