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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현 Nov 30. 2021

11. 나는 나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니모를 찾아서

1.

오래 연재를 쉬었습니다. 왜 쉬었냐고 하면 새로 입사했던 학교에 일이 너무 많아 글을 쓸 시간이 마땅치 않았고, 마땅치 않다보니 마땅한 일을 해내기 위해 집중력을 업무에 올-인했고 올-인하니까 집에 오면 눕고 싶고 누우면 OTT를 보고 싶고 세상에는 볼 게 너무 많아서 여가시간을 자의적으로 상납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았고 책을 읽지 않으니 자극을 받지 않고 자극이 없으니 누워서 숨만 쉬게 되었지요.


그러다 2021년 초 이직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기나긴 삶에서 마참내 정규직 계약을 따게 되었고 작은 회사의 무려 팀장이 되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첫 정규직 직장에서 팀장을 달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일의 연속입니다만, 그게 썩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재를 멈췄는데 이상하게도 구독자는 조금 늘어났고 한 자리 수라도 구독자가 유지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문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고 구독을 해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생각해보면 또 문학이란 무용한 것이고 저는 그런 무용을 적극 수용하여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고 그것이 곧 문학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문학이 대체 뭘까 최근에는 회의감에 빠져서 다시 구독을 해주시는 분들의 이유를 알 수 없어 벅차오르는 책임감으로 회사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 해 할 일을 입사 6개월 만에 다 클리어했더니 대표님도 딱히 구박하지 않는 눈치라서 최근에는 다시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 보름 정도 시간이 흘렀고 신춘문예 투고를 어느 정도 마쳤습니다.


아니, 선생님 여기가 아니고요,


뭔가 두서가 없다고 느끼신다면 그건 기분 탓일 겁니다. 누군가 가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건 그렇죠. 최근에는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된 심보선 선생님의 산문과 백은선 시인의 산문을 읽었습니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을 읽다 문득 다시 산문을 쓰자! 하는 마음이 들어서 책상에 앉아 의식을 풀어놓고 있기는 합니다만 뭔가 키보드 소리가 일정하게 들리니 괜히 회사에서 일을 하는 기분이 들어 뿌듯하면서도 앞으로 종종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최근 코로나 이후로 거의 해외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트남 북부를 다녀왔는데 그냥 해산물이 맛있었고 오토바이가 많았다 정도만 기억이 나네요. 제주도에도 몇 번 다녀왔는데 조각난 미역이 사람보다 훨씬 많은 바다에 들어가 자연산 미역국을 듬뿍 먹었던 날이 기억나네요. 친구와 함께 우도가 보이는 해변에 캠핑 의자를 펼치고 세 시간쯤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나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우도가 예쁘고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아 그러고 보니 스노클링도 했는데 마지막 스노클링은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의 도카시키 섬에서 혼자 산호초를 둘러싼 흰동가리 무리를 봤던 기억이 있네요. 제주도에서 봤던 생선은 뭔지 이름을 모르겠는데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 기억이 나네요.


이 생선이 떠오른 당신 따란! 이모삼촌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는 니모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구요! 출처는 위키피디아 입니다


그러니까 산문을 왜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냐 하면 백은선 시인의 산문을 보다보면 시인이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인생도 있고 이렇게 시인으로 살아도 살아지더라, 하는 그런 말입니다. 저도 그래서 등단을 할 때까지 등단일기 같은 걸 써볼까 30분 전쯤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 거 누가 읽겠어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연재의 방침은 철.저.히 의식의 흐름을 따른다는 컨셉이 있으니 또 그걸 누가 읽겠어 싶어서 그만 쓸까 하다가도 이 글을 쓸 때 저는 되도록 백스페이스를 누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 이렇게 나의 문학적(인 게 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자의식을 풀어놔야겠구나, 회사 내에서는 마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소리를 들려주면서 교묘하게 월급 루팡이 가능하겠구나 해서 계속 쓸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등단일기(아직 등단을 하지 않았기에 등단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할까 싶다가도 어디 가서 문청 대접보다는 글쓰는 사람 대접을 받을 때가 많고 여기저기 글을 발표했던 기록도 남아 있으니 그냥 쓰기로 합니다)를 쓰면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여전히 워밍업이 덜 된 기분이기는 한데, 시를 읽는다는 건 제일 먼저 화자의 정서에 독자의 싱크로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잖아요? 그냥 그걸 추적해가는 과정이라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언부언의 매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없으면 말고요.


어쨌거나 다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간 브런치에 발행했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기-승-전-결 그게 중요해??? 라고 물었던 2년 전의 제 자신이 아직도 제 안에서 살아 날뛰고 있으니 어디서부터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 글을 읽으면 문장이 무척 긴 것에 비해서 가독성이 꽤 높다고 인정해주기도 하니까 그냥 컨셉을 유지하기로 하고요, 그래서 오늘은 글이 길 수도 있는데 많은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항상 읽기 시작한 것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잖아요? 그러니 제 연재를 읽어주실 때는 그런 강박관념은 잠시 냉장고 싱싱칸에 넣어두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싱싱칸을 보고 이게 떠올랐다면 따란! 다시 한 번 이모와 삼촌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출처는 쿠팡 쿠팡에는 없는 거 빼고 다 있다구요!


지나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3.

창밖으로 비가 옵니다. 저는 비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라오스 북부를 여행할 때였는데, 캄보디아 국경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쩌다보니 며칠 후 라오스 북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죠. 라오스는 비가 자주 오고, 사회기반시설이 잘 구축되지 않아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많은 비가 내릴 때는 자주 정전이 되곤 합니다. 저는 부사어를 자주 글에 쓰는 편인데 자주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더라도 아 이건 이 글쓴이가 자주를 자주처럼 쓰지 않는구나 숨 쉬는 것처럼 쓰는구나하는 정도로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투고를 앞두고 소설 한 편 써둔 게 있어서 퇴고하면서 부사를 솎아냈더니 거의 A4 반 페이지가 삭제 되더라고요. 무튼 저는 부사를 많이 쓰는 편인데 그건 잠재의식에 첨언이 많은 무척 난잡한 양반이구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독 이번 글에 글을 읽는 분께 부탁을 많이 드리는 것은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는 글이기도 하고 구독자 수가 예전보다 다소 늘어난 상태이며 이 글이 약 2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글이니 다시 컨셉을 알려드리는 차원에서 적고 있습니다만 어쩐지 구독자 수가 줄어들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아 무슨 유튜버도 아니고 구독자 수에 연연하지 말자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데 또 구독을 해주신 분들에게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계속 첨언이 들어가니 그냥 그러려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라는 단어를 자주 쓰게 된 거 같은데 기분 탓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이 연재의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강박과 문학적 글쓰기의 양상을 타파해보자! 의식의 흐름으로 돌아가자! 기-승-전-결의 사고를 무화해보자! 하는 대단한(?) 컨셉이니까요.


무튼 라오스에서는 비가 많이 오는데, 천둥번개가 치면 높은 확률로 정전이 됩니다. 그 날도 그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죠, 제가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아래로 움직이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맞으면서 가자”더라고요.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냐”고 물었더니, “여행을 왔는데 그게 중요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데 메기였던가 빅토리아였던가 둘 다였던가 뭐 지금은 이름이 무엇이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고요,


방비엥일 겁니다 다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아조씨들이 보이는군요


저는 여행에서 중요한 게 뭘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여행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을 만나면서 내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취미생활입니다. 또 서울이라는 복잡한 도시에 살며 내 스스로 구축해오고 삽입되어진 관습 따위를 잠시 내려두기 위한 취미생활이기도 합니다. 해서 여행을 가면 되도록 그 도시와 그 문화의 룰을 따른다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습니다. 이건 관습과는 거리가 있는 규칙이니까 여전히 잘 활용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비가 엄청 내렸습니다. 그런데 메기와 빅토리아는 일부러 흙탕물이 든 웅덩이를 풍덩 거리면서 깔깔대고 걸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예쁘게 땋은 양갈래 머리를 나풀거리면서 마치 여섯 살 아이처럼 퐁당퐁당 잘도 걸었습니다. 저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는 비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우산 없이 사는 게 일종의 컨셉이었거든요.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교복이 싫어서 내 정신이라도 규율에서 탈피해 살자 하는 그런 마음이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 사이로 뛰어들었습니다. 두어 해 전쯤 이 기억에 대한 글을 한참 쓰다가 다 지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 글을 발행했던가 어쨌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냥 또 쓰겠습니다.


짱구는 못말리기 마련이죠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많이 잃어버렸구나, 여섯 살 일곱 살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처마 아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폴짝폴짝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정전이 된 식당에서는 손님이 도착하니 촛불을 켜주더라고요. 촛불을 켜고 음식이 나오니 어디선가 날벌레들이 주로 날개미들이 날아와 음식에 섞였습니다만 친구들은 스푼으로 아무렇지 않게 날개미를 건져내고 냠냠 밥을 먹었습니다. 저도 그날 개미 대여섯 마리를 먹었을 거 같은데 RIP를 보냅니다.


등단일기가 왜 이 기억에서부터 시작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합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는 게 등단일기의 목적이기도 해서요. 그러니까 스물일곱 쯤이었던 거 같은데, 라오스에서 저는 한동안 비를 맞았고 그 이후로도 여행지에서 비가 내릴 때는 우산을 사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도 퇴근하고 갑작스레 비가 올 때는 우산 없이 느릿느릿 집으로 가곤 합니다. 왜냐하문(맞춤법이 틀린 것 같다면 기분 탓입니다 저는 왜냐하면보다 왜냐하문이 표현이가 조크든요) 저는 서른넷의 총집합이 아니라 그간 쌓여온 내 자신의 총집합이라는 생각이 들고 자주 살면서 잃어버린 제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관습화된 규격화된 사회의 룰에서 가능한 저를 날것으로 노출시키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범법행위를 하지는 않습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4.

어쨌거나 다시 등단일기로 돌아가서요, 저는 여섯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섯 살 때부터 고대 법대생 아저씨와 분식집에 앉아 네 시간을 떠들던 녀석이었으니 서른 넷이 되어서도 글을 쓰고 있는 게 놀랍지도 않다고 하셨고 한글을 빨리 깨우친 덕에 일기 쓰는 습관을 만들어주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십 대 후반까지 일기를 썼으니 무튼 저는 거의 이십 년 넘게 일기를 쓴 셈입니다. 해서 저의 등단일기는 어쩌면 글을 쓰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고대 법대생 아저씨는 사실 아저씨가 아니라 스물일곱 쯤이었는데 공부에 회의가 와서 휴학을 하고 분식집에서 혼술을 하며 인생을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저와 몇 달을 보낸 후 복학하고 변호사인지 검사인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저씨가 저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머니께서 법대생에게 “대화가 통하냐” 물으니 “이상하게도 대화가 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엣헴.


그렇다면 그 모든 노력이 등단을 위해서였나 물을 수 있겠죠. 그건 아니겠습니다만 왜냐하문(저는 이 표현이 왜냐함은 이라는 표현과 왜냐하면 중간에 있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저는 이제 딱히 등단에 대해 큰 미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등단을 왜 하고 싶었냐면 대학생 때는 뭔가 선배들이 누리는 그것을 저도 누리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주변에서 작가라 대접해주고 어디 가서 ‘저 글을 씁니다 헤헤’ 수줍게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작가의 말은 귀담아 듣지만 문청의 말은 “니가 문청이라 그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만 요즘은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주변에 문청보다 작가가 많아져서 그런지 어쨌든 글을 발표할 지면은 없지만 제 글을 좋아해주는 여러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등단 해봐야 밥 먹여주는 거 아닌데 밥 먹을 직장이 생겼고 여기서는 점심을 무려 사줍니다! 어쨌거나 그런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다보니 등단을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된 거 같기도 한데, 해서 올해는 거의 투고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투고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건 글쓰기가 어떤 경지(라고 한다면 거창합니다만)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를 쓰다보니 시가 일정한 퀄리티 없이 들쭉날쭉 컨디션이 오갈 때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제가 쓰고자 하는 퀄리티의 약 80%를 끌어낼 수 있는 노하우(?) 같은 게 생겼습니다. 해서 연초에 서른 편 정도 초고를 쓰고, 그동안 썼던 글을 모아서 다시 고르고 해가지고 주변에서 아까우니까 투고를 하자! 해서 이번에 중복투고 없이 네 군데 마감을 했고요, 소설도 한 편 보내서 총 다섯 곳에 접수를 했습니다. 얼마 전 스터디를 다시 시작해서 구성원들과 최소한 한 곳은 보내자고 약속을 해두기도 했고요. 제가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게 되더라고요. 해서 약 2~3년 만에 다시 투고를 시작한 셈인데, 무튼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오예 To Go 끝났으니 이제 To Go 죄송합니다 아재라서요...


일기를 쓰는 건 제 자신이 잃어버린 제 일부 어쩌면 잊고 싶었던 제 일부를 다시 발견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등단일기를 써두면 제가 나중에 운이 좋아서 작가가 되었을 때 아, 이 당시에는 이런 나의 모습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만나면서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써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마치 백은선 시인이 이렇게 살아도 살아진다! 라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에서 자주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저도 약간 이렇게 살아도 등단이 되더라!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 구독자의 대부분은 문청일 거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무튼 우리 으쌰으쌰 하자는 취지에서 이런 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전히 왜 등단이 필요한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연초에 모 웹진에서 주최한 등단 관련 좌담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아직 등단을 하지 못했거나 등단을 거부한 작가(아직 쓰고 있으니 그냥 용어를 작가라고 합시다)들이 모였습니다. 독립문예지 위주로 작업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었는데 대다수는 등단을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까닭은 지금 서울문화재단이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서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등단이력이 가장 강력한 증명수단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인 기본소득이나 최소한의 창작비용을 지원받으려면 등단을 해야 신청자격이 생겨서, 그래서 준비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았죠. 저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제 주변 동료들은 제가 등단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수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이유가 가장 크고요,


※ 해당 좌담은 아래에 익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8193


그래서 이제는 등단은 제게 ‘자격’의 느낌이 더 큽니다. 예전에는 마치 신입사원 선발대회처럼 느껴져서 어떻게든 문학이라는 대기업에 입사하고 말겠어! 라는 마음이 강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아등바등 글을 써야하나 싶어서 내가 스스로 재밌으면 됐지 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내가 내 자신의 첫 번째 독자가 된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어 등단이 전처럼 크게 중요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 기분입니다.


해서 다시 등단일기로 돌아가면


5.

나는 나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 페이스북에 썼던 일기나 과거 몇 권이고 썼던 일기를 펼쳐서 읽다보면 아, 내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매년 이맘 때면 예전에 썼던 수십 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는 나름의 습관이 있었는데, 삼십 대가 되고나서는 포기했습니다. 읽어야 할 게 너무 많고 또 그 시절의 독기를 다시 만난다는 게 버겁기도 하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스물하나였나 그때 썼던 일기인데 부끄럽지만 여기 다시 옮겨보자면


나는 세상이 내 팔다리를 모두 잘라도 땅바닥을 이빨로 물어뜯으며 앞으로 갈 것이다


라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제 자신이 슬프기도 하고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다시 만난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술이라도 사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문장을 다시 발견한 이후로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두는 것처럼 일기를 다시 펼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스물의 제가 서른이 되기 전까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요, 한 사십 개 정도 되는데 그걸 다 해냈더라고요. 그걸 다 해내고도 이렇게 사는 걸 보면 스물의 내가 ‘어른’으로 가지고 싶었던 것들이 그렇게 작고 사소한 것들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예컨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던가, 나 혼자 살 수 있는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돈 걱정 없이 술을 산다던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걸 다시 보는 게 무척 아팠습니다. 나는 참 혼자라고 느끼면서 아프게 지내왔구나, 해서 술을 사서 마셨습니다.


수고한 나의 이빨에게 건배! 이제 임플란트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구!


대학에 들어와 생활비를 조금 벌게 되면서 가끔 양주를 사두고 집에서 혼자 마셨습니다. 영화 <소공녀>를 보면 이솜이 참 예쁩니다. 두 달 정도 덕질을 했던 적이 있는데 무튼 <소공녀>를 보면 주인공이 하루를 적당히 열심히 살고 바에 들러 싱글몰트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월세방에서 나와 텐트를 차리고 살게 되는데, 그래도 위스키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한 잔의 위스키를 위해 주인공은 지리멸렬한 인생을 견딥니다.


삶은 참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소공녀>를 보고 대단한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소공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과 인생을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사실과 인생을 열심히 산다는 생각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어서 노동하는 주인공에게 더 많이 노동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한 잔의 술을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잔의 삶으로 술을 마셔버리는 사람을 위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 김소연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종종 농담을 했죠. “우리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번 생은 망했잖아요? 이렇게 망해버린 거 더 망하면 어때요?” 뭐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쓰자는 의도로 말씀하신 거 같기도 한데, 저는 그 말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등단을 마음 먹고 시를 쓰기로 결정한 이상 이번 생은 망했다고요. 하지만 망했다는 말은 상대적이지 않겠습니까. 등단에 성공하고 사라지는 수많은 작가를 우리는 목격해왔습니다. 글을 쓰지 않게 된 작가를 만나기도 했고요. 쓰지 않는 나는 죽었을까요, 사라졌을까요? 연재를 쉬는 동안의 저는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코로나 덕분에 아무 것도 쓰지 못했고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죠. 그러다 어째 다시 동료들과 함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6.

나는 나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친구들은 저를 볼 때마다 늙지 않는다고 꽤 놀라워하는데, 제가 중고등학교 때 대단한 노안이었거든요. 지금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제가 제일 동안인 편에 속합니다(그러니 여러분 시를 쓰세요 젊음을 위해!)만 저는 애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아서 누군가를 책임지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 사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스물의 저를 견디는 일도 어려운데 부모님은 수십 년 저를 어떻게 견뎠을까요. 효심이 차올라서 고갤 들면 모니터 앞에 아저씨가 앉아있군요.


나는 나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린 내가 열 명이라면 아홉 명도 구하지 못하고 살게 되는 거 같습니다. 때문에 제가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재난을 소재로 종종 글을 쓰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생각한다는 말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OTT를 켜고 지구를 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봅니다.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남의 집을 쓸고 닦는 주인공을 봅니다.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먹으며 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다큐멘터리를 봅니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매품으로는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서 자주 하시는 "술을 싫어합니다 저는!"이 있겠습니다


얼마 전 단골 선술집에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0년 전의 사장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사장님의 얼굴은 그대로인데 사장님은 요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저는 약수에 살고 있는데, 장충체육관에서 약수로 넘어가는 언덕에 뱀탕을 파는 집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국 각지의 뱀이 고개에 올라 서울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드글드글하던 뱀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사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사장님에게는 지금의 약수가 생생한가요? 아니면 어린 시절의 약수가 생생한가요? 당신은 이제 걷지 않고 지하철과 차를 타게 되었기에 아직도 그 시절의 약수가 생생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생하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생생하지 않기 마련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글을 씁니다. 나는 나를 자주 잃어버립니다. 글을 쓸 때의 나는 글 속에 남습니다. 글 속에서 남아 시간이 흘러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넵니다. 잘 살고 있니? 등단은 했니? 좋은 사람은 많이 만났니? 그 시절 느꼈던 마음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니?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자유로워졌니? 그 숱한 전쟁같은 삶에서 아직 잘 버티고 있니? 사는 건 나아졌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아니... 그런 표정으로 묻지 마시고요 선생님...


그러면 그렇게 답하게 됩니다. 응, 요즘 재미있어. 등단은 못했어.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글쓰기는 여전히 재미있고 때로 날 힘들게 하지만 인생만큼은 아닌 거 같아. 인생이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 글이 나를 괴롭히는 게 훨씬 작아. 그래서 재미있게 좋은 사람들과 계속 쓰고 있어.


저는 경복궁 근처의 회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니 슬슬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왔네요. 원하던 회사로 이직하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정규직이 되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등단했습니다! 하는 글을 쓰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여행기와 일기와 상념이 뒤죽박죽 섞인 글을 또 당분간 써볼까 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누군가에게 이렇게 묻는 일이 점점 적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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