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장애아이는 들어갈 수 없는 강화 유리로 된 그들만의 성
둘째의 장애를 알고 장애를 배워 가면서 아직 먼 일이지만 학교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아이는 두 돌도 안 된 2세였지만 왠지 그냥 근처 어느 학교에 특수학급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사립학교에 특수학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학교의 통합교육에 대한 이념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임을 알고 대단한 끌림을 느꼈다. 사립이고 돈이 들겠지만 분리교육보다는 통합교육이 내 가치관에 맞다고 생각했기에 돈이 드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랑 둘이 열심히 벌면 되지 애한테 좋다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우리는 그곳을 목표로 둘째가 3살이 되었을 때부터 그야말로 ‘맹모’가 되었다. 기독교 학교이기도 하고, 그곳이 입학 과정이 힘든 걸로 유명해서 3년 전부터 미리미리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고 점수를 쌓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내년도 유치원 입시에 지원했다. 유치원인데 ‘입시’라니, 마치 열성 대치동 헬리콥터 맘이 된 기분이었지만, 그 또한 애를 위한 거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지금 6세인데 내년도에 6세 반으로 한 해 유예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유치원부터 다니면 아무래도 학교 입학할 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아직 물가에 내놓기도 불안불안한 아이지만 과감히 유치원 입시에 응했던 것이다.
지난주에 부모 면접을 봤고, 일주일이 지나 결과가 나왔는데 ‘불합격’.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사실 면접 때 어느 정도 예상했고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남편이랑 나도 했다. 붙어도 과연 이곳을 보낼 수 있을지는 우리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거라고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면접을 보고 나서 일주일 간 마음이 지옥이었고 떨어진 지금은 차라리 속 시원하다.
사실 우리가 이곳을 생각하고 준비를 시작했던 당시에는 아이가 3살이었고 3년 후까지 걷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5-6살엔 걷겠지 막연히 생각했는데, 여전히 걷지도 못할뿐더러 말도 전혀 안 되는 그냥 아기 중에서도 상아기가 바로 우리 애다.
아이의 발달에 조바심 내지는 않았지만 유치원 입시를 앞두고 애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덜 컸다는 것을 우리도 인지했다. 이 아이가 과연 통합을 갈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통합이 되고 안 되고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직접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이고, 장애 정도는 합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관계자들이 모두 이야기했기에 그렇게 믿었다. 설립자가 쓰신 책에서도 장애 정도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뽑는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 그동안 공 들여 준비했으니 일단 지원이라도 해 보자.” 남편하고 이야기하고 4월부터 본격적인 입시 과정에 돌입했다. 지원서를 쓰고 교육을 듣고 주중 예배 주일예배에 출석 체크를 하고 십일조를 내고 소모임도 하고 말 그대로 ‘빡세게’ 입시 과정을 따라가느라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그런데 면접에서 그 질문이 우리 앞에 떨어진 순간 우리는 직감했다. 아. 여기는 우리 아이를 위한 곳이 아니었구나.
대소변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교사들이 아이들이 실수할 때 갈아입혀 줄 수는 있지만 여기가 장애아 전문은 아니다 보니까 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하기는 어렵거든요. 아이들 인권 문제도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혹시 어떤 대안을 갖고 계시죠?
그랬다. 장애 정도를 보지 않고 뽑는다는 말은 일단 어느 정도 학습이나 유치원 생활을 따라갈 수 있는 애들 중에서만 그런 것이었다. 걷지 못하면 인지가 되든지, 인지가 안 되면 걷기라도 하든지. 우리 아이처럼 둘 다 안 되는 중증 뇌병변 장애 아이는 아예 그 ‘장애 정도’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음을 저 질문 하나로 순간 깨달았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은 특수학교 유치원에서는 교사의 당연한 일과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같은 업무도 장애 통합 유치원에서는 교사의 업무가 아니라 하니, 통합교육과 특수교육의 교사 업무 차이가 이렇게도 멀고 먼 차이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내년에 활동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필요하다면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동행할 수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지만, 말하면서도 나는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이곳 유치원을 보내야 하나, 지금 너무나 잘 봐주고 있는 장애전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데 굳이 내 아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아이를 넣어야 하나, 돼도 선뜻 보내기 힘들겠다…….
면접 이후 절망적인 기분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마 그 운동장 구석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필드 바깥으로 밀려나 주저앉은 기분이랄까. 기울어진 운동장의 바깥에도 사람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울어진 곳에서 아래로 아래로 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느라 밖에 있는 사람까지 챙길 여유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이상적인 통합교육을 하는 학교를 바라보고 시작한 거기는 한데, 유치원조차 기저귀 차는 아이를 어려워하는 마당에 학교는 더 말해 무엇하리. 우리 아이가 학교 갈 때까지 기저귀를 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유리천장이 아니라 ‘유리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통합교육이라는 유리의 성. 그곳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여 누구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주 단단한 강화 유리로 막혀 있어서 중증 뇌병변 장애아이는 들어가지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애초에 안 되는 게임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씁쓸함을 삼키며, 차라리 속 시원하다고 표현해 본다.
둘째는 아직 6세, 학교 가려면 몇 년 더 시간이 있으니 쓸데없는 이상 따위 버리고 우리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해 줄 곳이 어딘지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
통합교육의 ‘통합’은 과연 누구를 위한 통합인가.
장애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약자를 도울 줄 아는 비장애아이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기르기 위함인가.
비장애아이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일부 ‘기능 좋은’ 장애아이들이 통합 ‘되어짐’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