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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y 싸이 Jul 12. 2021

낏띠쿤


네가 내 왼손을 잡고 네 어깨 위로 두르면서 왼편에서 나에게로 기대 왔을 때 내 심장에서 저런 소리가 났다. 너의 왼손으로 나의 왼손을 계속 잡은 채 너는 편안하고 나른했다.


“피싸이, 우리 집에 먼저 가지 말고 형 집에 가서 한 잔 더 해요.”


나름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고 말했지만 술 취한 너의 목소리는 음량 조절에 실패했다.


“뭔 술을 더 먹어, 응? 집에 가서 그냥 자.”


운전대를 잡은 레오는 사람 좋게 너를 타일렀다.


그래, 집에 가서 자야지. 너 완전히 취했어. 둘이서 막걸리를 몇 병 마셨더라. 다섯 병이었던가. 나 오기 전에 너 먼저 맥주도 한 병 했지, 마지막에 소주도 한 병 나눠 마셨지. 취할 만도 하네. 그런데 너 맥주 네 병이 주량이라며. 간당간당 주량쯤 마신 거 아닌가? 운동하는 젊은이라 이 정도는 충분히 먹을 줄 알았지. 일부러 취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라고.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던가. 카운터를 맡은 피반이 너를 내 트레이너로 처음 소개해 줬을 때는 그냥 귀엽네, 무슨 트레이너가 이렇게 조그맣담 하는 인상이었지, 지금처럼 막 심장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록다운이 시작되고 체육관 문을 닫았을 때도 뭐, 그다지 생각나진 않았고. 사월 한 달을 통으로 날려먹고 오월이 시작되었을 때, 18일부터는 록다운이 해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네가 가져다준 두 개의 워드 파일. <유깝꽁>과 <땀러이퍼>의 태국어 대본. 합쳐서 칠백 쪽이 넘는 그 두 개의 파일을 받았을 때부턴가 보다. 내가 좀 똑똑한 사람들에게 혹하는 경향이 있어. 18포인트로 글씨가 좀 크긴 했지만 그 칠백 쪽을 채울 동안 계속 부지런히 일했을 너의 눈과 귀와 손과 동그란 머리. 너의 다갈색 자그마한 몸이 자가격리 중인 방에서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노트북으로 대사를 적고 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어떤 문 하나가 열렸고,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낏띠쿤 짜런시


트레이닝 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이름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라오스 사람 이름은 보통 두 음절짜리도 많은데, 태국 사람은 세 음절 이상 되는 복잡한 이름이 많다며, 너의 본명은 낏띠쿤이라 했고, 나는 그 이름을 절대 잊지 않았다. 구글과 페이스북을 번갈아가며 검색한 끝에 너의 페이스북을 발견했고 전체 공개로 설정된 겨우 세 장의 프로필 사진을 내 핸드폰에 저장했다. 부끄러워서 차마 친구 신청은 못 했다.


<유깝꽁>은 내가 라오스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방송된 태국 드라마다. 그때만 해도 나의 라오어는 어눌했고 태국어는 더더욱 오리무중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의 성장드라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고, 중국 화교 문화와 태국의 지방색이 어우러진 배경에, 배우들의 우아한 연기, 중독적인 시그널 때문에, 극장도 없고 티브이도 태국 방송 채널 몇 개를 제외하곤 볼 만한 것이 정말 없었던 그 초기 정착기에 꽤나 챙겨 본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속편 격인 <땀러이퍼>는 <유깝꽁>의 아이가 자라서 그다음 세대와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로, 내가 한국에 일 년 넘게 돌아갔을 때 방송되어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시 라오스에 돌아온 후 언젠가 태국 음반 가게에서 DVD를 발견하고는, 나중에 태국어 공부도 할 겸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 두기만 하고 이런저런 일로 바빠 챙겨볼 기회는 없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유깝꽁>은 이미 어디에도 정품 DVD를 파는 곳이 없었고, 태국 온라인 개인업자를 통해 복사판을 한 세트 사 두었지만 역시 영어 자막조차 없이 태국어를 듣고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어서 그냥 책꽂이 한편에서 먼지만 수북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가 터졌다. 라오스와 한국을 주 20회 이상 촘촘하게 잇던 직항노선들이 2월 말을 기점으로 완전히 끊겼고, 사람들이 왕래를 못 하면서 당연히 양국 간의 각종 프로젝트도 대부분 중단되었다. 한국 정부의 대라오스 개발협력사업 관련 통번역으로 먹고살던 나도 일감이 떨어져 하루하루 노는 게 일인 신세가 되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볼 만한 것들은 이미 꽤 봐 버려서 새로운 뭔가가 필요하던 차에 이 먼지 쌓인 DVD가 떠올랐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미뤄 뒀던 태국어 공부도 할 겸 이참에 이걸 번역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본도 없고, 태국어 자막조차 없는 드라마를 무슨 수로? 어릴 때부터 태국어를 노상 접하고 살아 원어민이나 다름없는 라오스 번역가 친구들에게 ‘듣고 대본 받아쓰기’ 견적을 받아 보니 총 18시간쯤 되는 한 시리즈에 몇백 달러나 한다. 수입도 똑 끊긴 참에 한낱 취미생활에 이렇게 돈을 퍼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3월 22일 밤 10시를 기점으로 라오스-태국 간 국경이 닫혔다. 국경은 닫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 정부 지침도 뚜렷하지 않고 다들 우왕좌왕하던 시기라 체육관들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태국인 여섯 명으로 구성된 너희 트레이너-매니저 팀도 라오스에 남아 일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라오스에서도 최초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이내 25일부터 본격적인 록다운이 시작되어 우리 체육관도 문을 닫아야만 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너는 일없이 계속 숙소에 머무른다고 했고, 나는 다시 <유깝꽁>, <땀러이퍼> DVD를 생각해냈다. 어차피 일도 없는 태국인이 쉽게 할 수 있는 받아쓰기. 다행히도 너에게는 노트북이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답게 워드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고 했다. 회차당 40분에 총 27회, 18시간 분량이니까 열흘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2020년 태국의 최저임금은 1일 336밧, 그럼 10일로 계산해서 대강 사천 바트면 어떨까. 놀아도 어차피 월급은 반이나마 체육관에서 나오는 거, 이 정도면 알바로 괜찮은 제안 아닌가?


대학 선배이자 동료 트레이너인 피분과 함께 처음으로 우리 집을 찾은 날, 너는 황토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라오스 사람들이 흔히 입는 색은 아니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내 형들 옷을 물려 입고 자란 내가, 고등학교 때 거의 처음으로 직접 골라 내 옷이라고 샀던 제누디세 잠바랑 색이랑 디자인이 비슷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너는 나의 사천 바트 제안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고, <유깝꽁> 받아쓰기를 먼저 해 본 후 실제로 들어간 시간이나 노력 감안해서 <땀러이퍼> 비용은 조정하자는 이야기에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삼월 말이었고, 사월은 라오스 새해 삐마이 연휴에 록다운까지 겹쳐 우리는 아무 연락도 없이 한 달을 날려 보냈다. 지금도 후회되는 게, 이때 너희를 몰래 우리 집으로 불러 맛있는 뭔가를 만들어주지 못한 것. 그랬더라면 우리 지금은 조금 더 가까워졌을까.


오월 초, 록다운 해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올 무렵 네가 왓츠앱으로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이싸이, 체육관은 5월 18일부터 열 것 같아요. <유깝꽁>은 한 이 주쯤 더 있다 드릴게요. 아이싸이도 잘 지내죠?”


세 문장이었다. 이때만 해도 너는 나를 ‘아이’, 형을 뜻하는 라오말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쯤 이미 <유깝꽁>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다. 한 달도 넘게 아무 연락도 않던 하도급이 갑자기 연락해서 이 주를 더 쓰겠다니. 열흘이면 충분할 일을 여태 못 한 거면 이 주를 더 있어도 뻔한 거 아니겠나, 쉽게 생각했다.


틀렸다. 내가 너무도 너를 몰랐다. 이 주 후가 아니라 바로 그다음 주에 너는 유에스비 메모리를 들고 나를 찾아왔고, 거기엔 <유깝꽁> 뿐만 아니라 <땀러이퍼>까지 완벽한 대본 받아쓰기 파일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사소한 대사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흔적이 역력한 받아쓰기 파일에는 헤더와 푸터에 제목이랑 페이지 번호까지 들어 있었다. 애초에 IT 관련 일로 라오스 땅을 처음 밟아 십오 년 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라오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문서에서 헤더-푸터-페이지 번호를 본 적이 없다. 너는 사십 분짜리 한 회를 받아쓰기하는 데 듣기를 반복하느라 거의 하루가 걸렸다고 했다.


갑자기 5월 18일 체육관 재개장이 기다려졌다. 평생 운동을 죽도록 싫어하던 내가 체육관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작년까지 누적된 통번역 작업의 여파로 급격하게 찐 살과 목디스크 증상 때문이었지, 결코 운동에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필요해서, 결제했으니, 안 가면 아까우니까 정도였던 동기 부여가 갑자기 너라는 급물살을 타게 된 거다. 그리고 18일 이후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체육관에 나갔다. 토요일 하루는 쉬기로 한 것도 그 날이 너의 쉬는 날이라 너를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토요일까지 나가서 너의 동료들이랑 친해지면 너와도 더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좀 너무 자신이 크리피하게 느껴졌다. 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더 소름 돋는 일이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운동하는 건 여전히 싫었다. 오랫동안 안 쓰고 방치해 늘어진 몸 구석구석을, 세심하고 예리한 너는 어떻게든 꺼내 기름칠하려 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가쁜 숨을 내뱉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가끔씩, 힘이 제대로 들어갔나 보기 위해 네가 내 몸을 만져주지 않았다면, 요새 한국에서는 성추행 이슈 때문에 수영강사조차 물에 안 들어오고 밖에서 말로 지도한다던데 네가 그렇게 말로만, 내가 아직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태국말로만 나의 운동을 이끌었다면, 나는 그렇게 열심히 출석하는 학생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목디스크 때문에 약간의 저림 증세가 있던 왼팔을 부들부들 떨며 플랭크를 하던 첫날, 너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세워 나의 배를 쿡쿡 찌르다 두터운 지방층에 가려 근육이 전혀 만져지지 않자 “죄송하지만” 하며 나의 배꼽에 손가락을 넣었고, 너의 손끝에서 파르르 전해진 전기는 머리끝, 발끝까지 뻗어나가 내가 첫 플랭크 삼십 초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최대한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를 모르고 지낸 지난날을 최대한 빠르게 업데이트하고 싶었다. 내가 없는 너의 과거에 어떻게든 나를 들이밀어보고 싶었다. 하루의 트레이닝은 보통 예닐곱 가지의 운동을 12회 4세트씩 하는 걸로 구성됐는데, 세트를 마칠 때마다, 한 종류의 운동을 마칠 때마다 나는 심호흡처럼 수다를 떨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게 너무 수다로 흘러 전체적인 운동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네가 직업의식으로 수다를 그만 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도 숨기는 것 없이 넙죽넙죽 잘도 대답했고 나에게 맞장구를 쳐 주기도 했다. 스물네 살의 나이라기엔 너는 너무 어른스러웠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리고 너는 너무도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너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면 세상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 날은 오랜 록다운 끝에 간만에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 나선 친구들과 낮술을 한 잔 한 금요일이었다. 나는 물론 너와의 트레이닝을 빼먹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누리는 간만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도 않았다. 네 시간쯤 계속된 생맥주 낮술 파티로 나도 슬금 달아올랐고, 씻고 가느라(트레이닝하면서 땀을 폭포처럼 흘리겠지만 그래도 네가 내 배꼽에 손가락을 찌를 때 조금이라도 덜 불쾌하게 해 주고 싶었다) 오후 네 시에 약속된 트레이닝에 조금 늦고 말았다. 나는 내가 멀쩡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멀쩡한 네가 보기에 나는 엄청 꽐라였을 것이다. 당연히 트레이닝은 술을 깨기 위한 심호흡 정도로 진행됐고, 나는 또 심호흡에 맞춰 엄청난 수다를 떨었다. 너는 왜 그걸 다 듣고 있었을까. 강습비를 낸 회원님이라서? 그게 정답이겠지만 술 취한 자의 행복 회로는 보통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얘도 날 좋아하나 봐!”


술김에 용기를 얻은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너에게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다.


“금요일인데, 별 일 없으면 아까 이야기한 한국 막걸리나 소주 한 잔 사 주고 싶은데. 몇 시에 일 마쳐?”


너는 정말 별 일이 없고 심심했는지 덥석 물었다.


“일곱 시에 마쳐요. 어디로 갈까요.”


두둥.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으니 안주는 부침개가 좋겠지. 주인장이랑 친하게 지내는 부침개 전문점 예약을 하면서 너의 왓츠앱 프로필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 혹시라도 네가 먼저 오면 이런저런 메뉴랑 해서 잘 챙겨줄 것을 당부해 두었다. 사실 그 날 오후 여섯 시에는 목디스크 때문에 침을 맞으러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너의 예스에 부웅 날아오른 기분에 낮술의 취기까지 덩달아 하늘로 뻗치는 바람에, 나는 너에게 문자를 보내던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알람도 없이 기절하듯 빠져든 초저녁 잠에서 나는 이미 너와 깊은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이럴 리 없다며, 이건 너무 작위적이라며 꿈속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깨어난 게 일곱 시 사십 분. 너는 이미 이십 분 전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더라. 어쩐지 너의 입술이 너무 보드랍다못해 찹쌀떡처럼 죽죽 늘어나는 게 이상하다 했다.


자전거를 미친 듯이 달려(이럴 땐 ‘키 롯팁 [자전거를 타다]’보다는 ‘빤 롯팁 [자전거를 (물레방아 돌듯) 돌리다]’이란 표현이 훨씬 적확하게 느껴진다) 약속 장소로 갔다. 미리 주문했던 음식은 이미 모두 준비되었고, 너는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는 맥주를 한 잔 따라놓고 있었다. 가게 주인장 애니와 그의 남편 레오는 바로 옆 테이블에서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션 너머로 가끔씩 너를 챙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낮부터 이미 취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쭈뼛쭈뼛 어색해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첫 술자리는 순식간에 막걸리 다섯 통만큼 익어갔고, 마지막에 주문한 소주가 한두 잔 들어갔을 때 네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걸 느꼈다. 너는 그게 언젠가 소주 한 박스를 친구들과 나눠 먹고 대취한 이후로 처음 먹는 소주라고 했다. 내가 주로 물었고 너는 주로 대답했다. 살아온 날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너의 이야기는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어린 시절로 가 닿았고, 나는 네가 여태 살아온 날보다 더 긴, 우리 사이에 놓인 세월의 차이에 탄식하며 오히려 제정신을 차려갔다. 어느덧 너는 나를 ‘피싸이’로 부르고 있었다. ‘피’는 라오어 ‘아이’에 해당하는 태국말이다. ‘싸이’는 태국 발음으로 ‘차이’지만 너는 둘을 섞어 편한 대로 나를 불렀고, 나는 그게 좋았다.


열두 시. 가게는 닫을 시간이었고, 우리도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하며 혼돈 속에서 피어날 수도 있는 어떤 기회를 노려볼까도 싶었지만, 네가 살아온 날보다 두 배를 살아온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너도 숙소와 체육관을 오가는 공용자전거를 타고 온 터라 더 취하면 빤롯팁도 못 할 것 같았다. 술값을 계산하고, 무려 십오 년간 자전거를 타고 비엔티안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음주 야행을 일삼아 온 내가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큰 대로를 피해 차가 없는 길로 너를 이끌기 위해 술집 바로 옆의 골목 어귀에서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네가 오지 않았다. 다시 술집으로 돌아갔더니 앞에 너의 자전거가 쓰러져있고, 그새 눈이 풀린 너를 가게 주인 남편 레오가 부축하고 있었다.


“얘, 자전거 못 탈 거 같은데. 자전거 차에 싣고 내가 데려다 줄게요. 형 자전거도 같이 실어요.”


옆 테이블에서 주인장과 이야기하고 있던, 나도 안면이 있는 다른 한국인 손님이 흔쾌히 차 열쇠를 내밀었다. 자기 차가 픽업이어서 자전거 싣기가 편하다며. 그렇게 두 대의 자전거를 포개어(그 와중에 나는 또 이 포개진 너와 나의 자전거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짐칸에 싣고 너를 뒷자리에 밀어 넣었다. 조수석에 타려고 했더니 차주인의 짐이 잔뜩 있어 나도 뒷자리, 네 옆에 앉았다. 숙소 위치는 대강 알고 있었다. 체육관에서 걸어서도 다니는 거리라고 했으니까. 자전거로 겨우 일 분 걸리는 우리 집과도 멀지 않았고, 너를 먼저 데려다주고 내가 내리는 걸로 레오와 얘기하던 중이었다.


네가 내 손을 잡은 것은.


그리고 쿵.


다시 문이 하나 열렸다. 너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발견한 이 문이 어디로 나를 이끌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취한 너를 숙소에 고이 데려다 줄 작정이다. 하지만 이 문이 열린 이상, 그 앞에 내가 모르는 길이 놓여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주 금요일, 네가 쉬는 토요일 앞날에도 나는 다시 용기를 내 보겠다. 이 문을 찾아서 다시 두드려 보겠다. 낏띠쿤 짜런시, 네가 그 문 앞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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