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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y 싸이 Aug 09. 2021

카오뿐

시간을 훔치는 라오스의 맛


카오뿐의 '뿐 ປຸ້ນ'은 라오말로 '훔치다'라는 뜻인데, 여기선 아마도 그런 뜻으로 쓰였다기보다는 분짜, 분보 이런 베트남 음식 이름에 붙는 Bún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지금은 영어의 fun 비슷하게 소리 나는 粉이 중세 중국어에선 '분' 비슷한 발음이었다는데, 그게 베트남을 거치거나 아니면 바로 라오스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라오스에서 카오뿐이라 하면 쌀가루를 발효해서 만든, 말리지 않은 생면을 말한다.


카오 ເຂົ້າ : 쌀, 밥, 식사의 통칭


갓 뽑아 나온 카오뿐 생면과 국수귀떡(?)

카오뿐에 아무 수식어가 안 붙으면 이 생면 자체의 이름이기도 하고, 페라나칸 퀴진의 락사 비슷한 어탕+코코넛 밀크로 만든 국물에 이 면을 말아먹는 음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발효를 거쳐 면을 뽑아내기까지가 만만찮지 않을뿐더러 뽑은 생면을 오래 보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전문 식당에서 먹는 게 아니고서야 일반 가정에서는 여럿이 한 번에 많이 먹을 수 있는 기회에나 종종 등장한다. 우리 결혼식에 국수가 안 빠지는 것처럼, 라오스 잔치에도 그래서 카오뿐은 빠지지 않는 메뉴다. 우리가 골뱅이무침 같은 진한 양념의 음식에 국수를 비벼 먹는 것처럼, 라오스 하면 떠오르는 음식 땀막훙에도 카오뿐을 섞어 땀카오뿐을 만들어먹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종목은 다양한 카오뿐 요리 중에서도 카오뿐 째오킹, '생강(킹) 소스(째오)의 카오뿐'. 보통 카오뿐 째오킹을 파는 가게들은 간, 염통, 귀때기 등의 돼지 부속 삶은 걸 손님이 뷔페식으로 골라 담으면 거기에 끓고 있는 육수를 부어 카오뿐을 말아 주는 게 보통인데, 올해 처음 알게 된 이 가게는 좀 특이하게, 카오뿐 대짜 중짜 소짜 중에 골라 시키면 빈 그릇이랑 뜨거운 면수(거의 맹물이다) 주전자를 달랑 갖다 준다. 그럼 테이블에 비치된 째오킹(땀막훙에 들어가는 빠댁을 베이스로 이것저것 주섬주섬 뭘 많이 넣은 거 같은데 이게 핵심 양념이다), 미원, 설탕, 남빠로 간하고, 생고추+생강(엄밀히 말하자면 큰고량강) 다진양념이랑 데쳐주는 각종 채소, 그리고 막 뽑아 나온 생카오뿐을 넣어서 본인 입맛대로 완성하는 식이다. 빠댁이 안 구리기가 쉽지 않은데, 이 집 빠댁은 구림의 정도가 아주 빼어나게 덜하고 대신 감칠맛이 폭발한다. 삥빠를 한 마리 따로 시켜서 살을 발라 섞어 먹으면 더 맛나고, 또 키압무까지 곁들이면 달콤구리매콤구리짭쪼름구리고소고소한 맛이 완성된다. 생면 뽑으면서 중간중간 끊을 때 생기는 짜부라진 반죽 덩이도 조랭이떡처럼 몰캉줠깃한 게 씹는 맛을 더한다.


땀막훙 ຕຳໝາກຫຸ່ງ: 태국말로 솜땀이라고 하는, 그린파파야샐러드라고 우아하게 부르기에는 넘나 구린 그거. 태국식 솜땀에는 빠댁이 안 들어가고,  빠댁 안 들어간 땀막훙은 땀막훙으로 안쳐줌

빠댁 ປາແດກ : 정제하지 않은 생선젓갈. 라오스 시장통의 내음시를 결정짓는 존재

삥빠 ປິ້ງປາ : 생선숯불구이. 보통 틸라피아(민물돔) 주둥이에 레몬그라스 등속을 쑤셔 넣어 구움

삥까이타빠댁 ປິ້ງໄກ່ທາປາແດກ : 다리만 무지 길고 먹잘 것은 별로 없는 토종닭에 위의 빠댁을 발라 숯불에 구운 것

남빠 ນ້ຳປາ : 태국말로는 남쁠라, 베트남 말로는 응옥맘, 한국말로는 액젓. 빠댁을 영접한 인간에겐 약간 간장처럼 시시한 존재

키압무 ຂຽບໝູ : 돼지비계 튀긴 것. 땀막훙 같은 매운 거랑 찰떡궁합이지만 내 뱃살과도 찰떡궁합인 그거


카오뿐 한상차림. 정작 주인공 카오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카오뿐에 딸려나오는 채소들(줄기콩, 고수, 데친 공심채+양배추, 싹틔운 녹두, 빻은 고추+갈랑가)과 삥빠, 삥까이
뜨거운 맹물에 - 째오킹을 넣고 - 각종 채소, 양념으로 간하고 카오뿐과 생선살을 말면 완성
키압무를 더하면 이제 흡입 준비 완료.

둘이 가서 이렇게 카오뿐 소짜 하나, 삥빠 하나, 삥까이타빠댁 하나에 콜라랑 물 시켜먹으면 십오만 낍(한국돈으로 만 오천 원 정도)이 채 안 나오는데도 배는 산맨치로 빵빵해진다. 흐르는 메콩강을 앞에 두고 원두막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카오뿐 국물을 제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온은 요새 연일 삽십 도를 웃돌지만 선들선들 불어오는 강바람에 맥주 한 잔 없이도 마냥 늘어지는 기분이다. 나만 그런 기분인 건 아닐 테니 강변의 원두막들이 이렇게 주말마다 바글바글할밖에.

뚭(원두막)마다 손님들이 들어차 있으니 행상들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물건을 판다.
메콩강 건너편은 태국이다.
언제나 황톳빛 물이 유유히 흐르는 메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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