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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Mar 30. 2017

다양성의 축복, 싱가포르의 페라나칸 요리

브런치X싱가포르 프로젝트

음식문화의 다양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식재료의 풍부함? 요리사들의 창의력? 뚜렷한 기후? 모두 연관이 있지만 가장 강력하고 폭발적으로 영향을 주는 건 바로 ‘식문화의 충돌’이다. 한 문화권의 식문화는 고립되어 있는 것보다 서로 상이한 문화권의 식문화가 서로 맞부딪힐 때 비로소 다양성을 얻게 된다.


문명간의 충돌은 곧 식문화의 충돌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 말, 소주와 같은 증류주 제조법이 전해지게 되면서 전통주 문화는 그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일본의 식문화가 이식, 변형되어 우리 식탁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기원이 모호한, 그렇다고 한국 전통 음식으로도 보기 어려운 짬뽕이나 짜장면 같은 요리들은 식문화의 충돌을 통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혼종 요리다.


음식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시칠리아도 과거 수많은 민족들의 외침을 받고 민족과 인종이 한 데 뒤섞이면서 독특한 요리들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파스타도 이러한 기반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이탈리아 식문화가 시칠리아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유다.



문명간의 충돌은 꼭 전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16세기 유럽의 식문화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신대륙에서 건너온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이 식재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됐기 때문이다.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유럽의 식탁 풍경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동남아시아 해양 요충지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일찍부터 중국과 인도, 아랍, 유럽의 선박들과 물자가 모이는 교역소로 번성했다. 자연히 다양한 인종과 민족, 문화가 한데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탄생하게 된 것이 페라나칸 Peranakan이다. 페라나칸은 일찍이 기회를 찾아 말레이반도로 온 해외 이주민과 현지 주민 사이에 혼혈 후손을 뜻한다.


중국, 특히 말레이반도와 가까운 푸젠 성과 광둥 성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했다. 오늘날까지 페라나칸 중 다수는 중국계다. 페라나칸 남성은 바바 Baba, 기혼 여성은 뇨냐 Nyonya라고 부른다.


페라나칸은 싱가포르 인구 중 3%를 차지하는 소수다. 페라나칸은 보통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말레이인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사고체계와 생활양식을 유지하되 말레이의 문화에도 익숙한 그들이었이다. 이 때문에 폐쇄적인 가치관을 가진 중국인보다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뛰어난 것이 페라나칸의 특징이다.


음식에서도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레이시아 지방에는 푸젠 성과 광둥 성의 조리법으로 만든 요리에 동남아시아의 강렬한 향신료가 접목된 요리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식 국수와 쌀 요리에 동남아 요리에 빠지지 않는 코코넛 밀크와 라임, 타마린드, 바나나 잎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이러한 혼종 요리를 일컬어 페라나칸 요리 Peranakan cuisine라 한다.




페라나칸 요리들은 전반적으로 맵고 자극적이다. 페라나칸을 구별하는 방법은 '매운 음식을 주저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매운 것을 좋아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한국 사람들도 울고 갈 정도로 강력한 매운맛을 자랑하는 요리들이 많다.


고추를 비롯해 강황, 생강, 산초, 레몬그라스 등 입안에서 폭발적인 풍미를 내는 향신료들을 많이 사용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직선적인 매운맛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우리네 고추장 같은 역할을 하는 삼발 Sambal 소스가 대표적인데 매콤하면서고 달콤 새콤한, 무어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맛을 낸다.


페라나칸 요리의 또 다른 특징은 조리법이 표준화,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조리법이 각 가정마다 있다. 이 때문에 그 맛도 천차만별이다. 각지에서 노냐 퀴진 Nyonya cuisine으로도 불리는 다양한 페라나칸 요리를 맛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이다.






싱가포르에서 최근 힙스터들의 거리로 뜨고 있는 티옹 바우(Tiong Bahru)에 있는 페라나칸 요리 전문점 '하우스 오브 페라나칸 쁘띠 House of Peranakan Petit(이하 쁘띠)'을 찾았다. 하우스 오브 페라나칸 그룹의 창시자인 페라나칸 '치 콰이 Chee Quai'는 그의 어머니 '코 비아 칫 Koh Via Chit'의 요리에 영감을 받아 1980년대 논야 퀴진 Nonya cuisine 유산을 계승, 보존시키고자 하는 차원에서 식당을 열었다. 현재 그가 이끄는 세 식당 중 쁘띠는 가장 캐주얼한 곳이다.



Fish head Curry


쁘띠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메뉴는 '피시 헤드 커리 Fish head Curry'다. 문자 그대로 생선 머리를 넣어 만든 커리의 일종이다. 중국과 인도 말레이시아의 요리가 한데 뒤섞인 재미있는 요리인 피시 헤드 커리는 다양한 식문화가 혼합된 페라나칸 요리를 대표한다. 매콤하게 끓인 매운탕에 카레 등 향신료와 코코넛 밀크를 섞은 요리라고 보면 쉽다.


맛은 무척이나 얼큰한데 강렬한 매운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우리에게 '어두일미魚頭一味'란 말이 있듯 중국에서도 생선 머리는 진미로 손꼽힌다. 젤라틴이 풍부한 머리에 붙어 있는 껍찔과 살은 몸통의 살코기와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머리뼈에서 우러나오는 생선 육수도 맛의 풍미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Otak-Otak


오탁-오탁 Otak-Otak이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요리는 일종의 어묵이다. 고등어나 새우를 타피오카와 터메릭, 고추, 카레가루 등 향신료를 한데 뒤섞어 바나나 잎에 싸서 굽는 요리로 들어가는 재료는 스무가지가 넘는다. 싱가포르뿐 아니라 말레이 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오탁-오탁은 간편하게 어묵처럼 즐길 수 있어 길거리 간식으로도 애용된다.


쁘띠에서 맛 본 오탁 오탁은 계란찜과 같은 형태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은은한 향신료의 맛과 생선 어묵의 맛이 익숙하면서도 독특하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풍미가 인상적이다.


Ayam Buah Keluak


아얌 부아 켈루악 Ayam Buah Keluak도 무척 흥미로운 요리다. 블랙 너트, 풋볼 프루트로 알려져 있는 부아 켈루악의 속과 다진 고기, 향신료를 섞어 만든 페이스트를 껍질 안에 넣은 후 닭과 함께 좋인 치킨 스튜의 일종이다.


풋볼 프루트는 씨앗과 껍질에 독성이 있는데 한 번 삶은 후 재나 바나나 껍질로 40일 동안 덮어 두어야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쇠고기나 닭요리에 많이 사용되는데 밤톨처럼 생긴 껍질에서 나오는 톡특한 향과 맛이 특징이다. 라임과 레몬그라스, 강황, 고추 등 강한 향신료가 많이 사용돼 피시 헤드 카레처럼 강렬한 매운맛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음식들의 존재는 미식가들에게는 크나 큰 축복이다. 중국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의 전통 요리들을 언제든지 맛볼 수 있고, 독특하면서 개성 넘치는 페라나칸 요리까지 즐길 수 있는 싱가포르는 '미식의 도시'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본 포스트는 싱가포르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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