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브리너 탄생 95주년을 맞아 (2015년 글)
오마 샤리프 사망 소식에 율 브리너가 떠올랐어요. 이 아저씨도 세상 뜬 지가 한 20년-_-;;30년 됐지만 그래도 나름 저에겐 흑백 TV 시절 스타거든요. TV로 한두 번 방송한 게 아닐 텐데, 볼 때마다 형제들이랑 율 브리너가 태국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있네요. 요새 가끔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왕과 나>랑 그 주연배우를 모른다는 사람이 꽤 많아 세대차이를 느끼곤 합니다. 오늘은 불러주는 이 없는 토요일을 맞아 <왕과 나> 사운드트랙을 틀어놓고 율 브리너랑 영화 관련 잡다시한 이야기 좀 하려고요. :)
1.
율 브리너는 혁명기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으로, 나중에 중국 하얼빈으로 이주했고, 일제 치하의 조선땅을 드나들며 벌목업, 숙박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 함경도 땅에도 자주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유년을 거의 이 인근에서 지내며 "섬머 코리안 보이"로 불리기도 했다네요. 광산업을 하던 브리너의 할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달네고르스크라는 도시를 하나 만들 정도로 이 지역의 유력자였던가봐요. 율 브리너는 "할리우드의 러시아 황제"로 불리며 블라디보스토크에 본인 이름을 딴 공원에다 동상까지 서 있을 만큼 여전히 추앙받고 있고요,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 국제영화제에서는 율 브리너 특별상을 매년 수여하고 있습니다. 2014년 수상자는 러시아-라트비아-프랑스 합작영화 <Two Women>의 애나 레바노바였어요.
2.
율 브리너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건 다름 아닌 뮤지컬 <왕과 나>죠. 오리지널 초연부터 브리너가 공연한 횟수만 무려 4,625회!! 우리나라엔 1956년도 율 브리너 데보라 커 주연의 영화판으로 소개됐는데, 이건 1) 싸얌(태국의 옛 이름)의 몽꿋왕(라마 4세)의 자녀교육을 위해 고용됐던 영국 여성 애나 레오노웬스의 자전서를 바탕으로 2) 마거릿 랜던이 <Anna and the King of Siam>이란 세미-픽션으로 써낸 걸 3)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리처드 로저스가 뮤지컬로 각색한 것을 4) 어니스트 리먼이 영화 시나리오로 다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애나 레오노웬스의 자전서 자체부터가 역사학자들로부터 뻥이 심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왕을 실제로 대면할 기회도 몇 번 없었으면서 자기의 역할을 너무 부풀려 썼다는 거죠. 즉, 최종 영화판의 <왕과 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각색이 많이 들어갔고, 실화와는 꽤 거리가 있을 거란 얘깁니다.
3.
이런저런 연유로 <왕과 나>는 태국에서 금지된 품목입니다. 소설이건, 영화건, 뮤지컬 DVD건 걸리는 대로 무조건 압수에다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21,000밧(70만 원 정도)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고요, 공공 상연을 감행하는 경우에는 국왕모독죄로 최고 사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습니다. 태국의 입헌군주제는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군사정부와 엘리트 민주정부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유지돼오고 있는데, 정권을 잡은 실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던 데다, 또 현재의 푸미폰 국왕(몽꿋왕의 증손)이 엄청난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69년간이나 왕위를 유지하고 있어(재임 중인 세계의 지도자들 중 최장기, 태국 역대 왕들 중에서도 최장기) 지금은 거의 신격화된 터라 이 권위에 도전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태국 돈은 어딜 가나 굉장히 깨끗한 편인데(바로 옆 나라 라오스의 돈은 거의 걸레 수준도 많습니다) 모든 지폐에 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국민들이 지극정성으로 돈을 관리하기 때문이지요. 가게 같은 데서 서양 여행자들이 바지 주머니에서 땀으로 축축해진 지폐를 꼬깃꼬깃 꺼내는 걸 보면 주인이 질겁을 하며 받아 정성스레 펴고 앞뒤 그림을 맞춰 보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돈을 발로 밟아도 잡혀가요. 극장에서 영화 상영하기 전에도 국왕 찬가가 나오는데 당연히 일어서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4.
1999년에 주윤발, 조디 포스터 주연으로 <애나 앤드 킹>이 다시 만들어졌죠. 기존의 <왕과 나>가 <300>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 1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서구적으로 편향된 시선에서 몽꿋왕을 성질 고약하고 야성미 물씬 넘치는 육체적 인간으로 그리면서, 문명사회 여성인 애나가 어떻게 몽꿋왕과 그의 나라를 변화시켰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새 <애나 앤드 킹>은 탈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애나라는 여성의 내면적 변화에 주목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아직 안 봤어요). 수정된 시나리오로 이렇게 주장하며 태국 현지 촬영 가능성을 타진해봤지만 태국 당국의 대답은 역시 단호한 아니오! 결국 말레이시아의 페낭, 랑카위 등지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네요.
5.
율 브리너는 그 뮤지컬을 내내 소화했으니 당연히 영화에서도 직접 다 노래를 불렀고요, 애나 역의 데보라 커는 마니 닉슨이라는 가수가 대신 노래를 불렀지요. 닉슨은 그 당시 돈으로 $420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애나 역은 브리너와 함께 뮤지컬을 초연했던 거트루드 로렌스가 맡을 거였는데, 1년 만에 간염 혹은 간암으로 의심되는 병으로 죽는 바람에 그 이후의 다른 파트너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율 브리너의 땡깡으로 데보라 커로 낙점됐다네요. 브리너는 영화화 이야기가 오가던 시기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던 연극 <Tea and Sympathy>에서 데보라 커를 처음 봤다고...
6.
역시 마무리는 이렇게 해야겠죠. Shall we dance, shall we dance, shall we dance?
사족1. 저는 이 영화 덕분에 영어를 배우기도 전에 '엣 세트라'가 '기타등등'이란 걸 알았지요. 그런데 기타등등이 뭔지 잘 몰랐던 듯.
사족2. 유튜브에 <왕과 나> 영화 전체가 올라와 있군요...저작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