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조금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개발이 좋았다.
무언가 만드는 일이 좋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몰입에 빠져드는 게 좋았다.
중학교 때는 'C언어 300제'라는 책을 사서 읽었고,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종로에 있는 컴퓨터 학원에 찾아가 청강을 할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관련된 학과에 진학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으니, 다른 길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이 일에만 몰두했다.
일에 집중하는 만큼 실력은 늘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 삶에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로 성장하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정작 그 나이대에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은 대부분 놓치고 살았다.
30대가 되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제야 일 이외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막상 다른 걸 해보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갑자기 관심을 가지려 해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평생 일만 하고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여러 활동을 닥치는 대로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깨야 할지 몰랐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일이 다시 바빠졌다.
바쁜 프로젝트가 연달아 시작되자 다른 활동에 신경 쓸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지쳐서 잠들기 바빴고,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자거나 다음 주를 위해 쉬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원래의 모습으로, 익숙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일상은 익숙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큰마음먹고 시작한 변화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건 아닐까.
역시 나는 일만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한동안 그런 생각들에 갇혀 지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이것은 완전한 원점으로의 회귀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분명히 달라진 게 있었다.
예전의 나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면, 지금의 나는 그 세상의 존재를 알고 있다.
비록 서툴고 어색했지만, 그곳에 직접 발을 디뎌본 경험이 내 안에 남아있다.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
의미를 알 수 없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새겨져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가끔 궁금해진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내가 해보지 못한 다른 일들은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문득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나의 세상은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낀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제 나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다시 익숙한 문밖으로 나설 용기가 필요한 날,
지난 1년간의 서툰 경험이 작은 이정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